
빌립보서 2:5~8절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본래 한국말이라는 소리를 들어봤어요.
시골에 금실이 좋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가 하루는 할머니와 숨바꼭질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찾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숨어슈”
농담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그리숨었니 하는 겁니다.
성경의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죄가 아담을 숨게 했고, 부끄러움이 숨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오셔서 그리숨었니.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숨어슈로 서로 인사해요.
성탄은 내가 사는 동네에 이사 오신 날입니다.
본문은 이사오신 이유를 가장 잘 정리한 말씀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바르게 성탄을 기념하는 겁니다.
6~7절이 성탄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낮아지심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감동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탄을 경건과 연결합니다.
디모데전서 3:16절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경건의 비밀이 놀랍습니다.
이후에 경건의 지침인 처신, 행동, 삶, 경건한 삶과 같은 나와야 하는데, 찬송했습니다.
어떻게 연결되는가?
성탄의 중심은 성육신을 붙들지 않으면 경건은 부담이 됩니다.
성육신을 붙들면 경건은 은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오셨습니다.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사를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나를 살리셨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셔다라는 선언입니다.
낮아지심이 성탄의 정신이고, 이 마음을 품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 마음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관계의 영역에서 품고 사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낮아지셨나요?
우리가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거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임금이 잠깐 거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거지가 되었고, 거지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첫 번째는 무명인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렛 시골에 사는 청년과 처녀입니다.
부부는 너무나 가난하고, 아무런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부부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말씀은 눅 2:22~24절입니다.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는 어린양을 바치기 힘든 여인들이 아들과 딸을 낳고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만큼 가난했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했을까요?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낮아짐의 본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난은 내려놓을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두 번째는 태어난 장소와 환경입니다.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빈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수 있었을 텐데, 빈방이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마굿간을 택했습니다.
짐승의 똥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마굿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결코 미화된 목가적인 풍경이 아닙니다.
마굿간에 태어나서 아이를 구유=여물통에 눕혔습니다.
구유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비위생적인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아들을 구유에 눕히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눈이 오면 우산을 준비시켜 주고, 추우면 두꺼운 옷을 입히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환경에 허락하셨을까요.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장 힘들 때 주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셔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저는 올해도 주님의 손 의지해서 왔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세 번째는 축하객의 신분입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찾아온 축하객은 목자였습니다.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동을 생각하면 낭만적인 직업으로 보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시를 짓고, 긴 지팡이를 들고 넓은 들판의 주인처럼 풀을 먹이는 목동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당시 목자들은 사회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법적인 증인조차 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양들을 돌봐야 하기에 안식일을 지킬 수 없어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성탄은 위대한 하강입니다.
기독교는 위대한 상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대한 하강의 이야기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겸손한 마음이며 겸비한 삶입니다.
겸손의 뜻은 비굴함과 굴욕을 의미합니다.
노예처럼 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세리처럼 사는 겁니다.
누가복음 18: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세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속에 죄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낮아진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사는 겁니다.
바울은 사역이 많아지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깊이 동행했는데, 그러면 의로워졌다고 해야 합니다.
반대로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비추는 빛에 가까이 가니까 죄가 더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때 그리스도로 채워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실체를 보면, 진정으로 낮아집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 낮아집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은 의가 아니라 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움이 진정한 채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비워져야 진정한 것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길을 여는 사건입니다.
성탄은 경건을 낳는 시작입니다.
성탄은 경건과 연결됩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채워지는 경건으로 연결됩니다.
나는 자꾸 없어지고 예수만 보이는 단계로 나아가는 경건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 목적이 되길 바랍니다.
나머지는 부수적인 일입니다.
예수로 충만하면 됩니다.
예수의 마음을 기억하는 성탄의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겸손해지는 12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 하나님께 순종함, 정직한 고백, 가난에 만족함, ~~~12번째 겸손의 몸가짐입니다.
그런데 겸손의 12단계를 통과하면 가장 교만해진다고 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예수님으로 채워질 때 가능합니다.
예수 정신으로 채워질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리에 오셔서 끝까지 견디어 순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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