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9:32~43절
사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부목사 시절 바른 소리를 많이 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담임목사님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바른 소리를 내셨던 부목사님도 담임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평소에 바른 소리를 잘하셔서 담임목사로 잘 사역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자신이 비판했던 담임목사님보다 훨씬 목회를 못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자리에 올라가서 행동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쾌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3천 명 회개했고,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각종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빌립 집사님이 세운 사마리아교회를 순방하며, 교회로 인정해 주는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과연 베드로 사도는 어떻게 살았는가?
베드로 사도의 삶의 방식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첫 번째 베드로의 삶의 방식은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사방을 다녔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사마리아교회에 갔다 왔습니다.
교인들에 성령이 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기도해 주었더니 성령님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32절에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고 합니다.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박형섭 원로 목사님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75세에 새로운 자연 치료학을 배우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려는 열정이 남다릅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은 매주 자비량으로 섬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물질로 섬기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17km 떨어진 동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입니다.
그곳에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느낌상 여자 이름 같은데 남자입니다.
그는 8년 째 중풍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이끌려 룻다에 간 것은 애니아를 통해 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니아를 낫게 함으로 35절에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욥바까지 내려갑니다.
욥바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입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있는 곳이라면 이방인 동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삶의 방식은 10장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돌아다녔습니다.
두 번째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낫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이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자를 애니야를 고치고,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살립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침상을 가지고 집에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는 34절에서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령합니다.
똑같이 중풍병자를 낫게 했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명령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 5장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어서 가족들이 울고 있습니다.
집에 도착한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아이의 손을 잡아 달리다쿰했습니다.
아람어인데 애야 일어나라, 딸아 일어나 학교 가야지와 같은 평상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물리치고 기도했습니다.
다락방이 예배하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약속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명령입니다.
만약 베드로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역사의 순간인데, 보여줘야지 사람들이 따를 것 아닙니까?
안수하는지 보라고 하면서 다비다를 살릴 겁니다.
그러면 추종자가 생길 것이고 자기의 이름이 높아질 겁니다.
베드로는 내가 이런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두 기적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5절과 42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베드로를 따르거나 베드로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께 돌렸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베드로의 삶의 방식입니다.
아람어로 다비다이고 도르가는 헬라어 이름입니다.
신약성경에사 여제자라는 단어는 다비다에만 딱 한 번 씁니다.
다비다는 사슴이라는 의미입니다.
아가서 등장하는 술람미 여인을 어린 사슴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슴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있는데 빨리 와 달라는 간청을 받았습니다.
다비다가 죽었는데 장례를 집례하기 위해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가 도작하여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들이 울고 있습니다.
39절은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면서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라며 보여줍니다.
코트와 일상복인데 그것을 보여줍니다.
다비다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사랑의 흔적입니다.
다비다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과부들을 도왔습니다.
선행과 자선으로 꼭 찬 사람입니다.
선행을 하고 구제에 힘써도 병들 수 있고,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병들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평생 도움의 받은 사람으로 인해 드러납니다.
죽음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사는 겁니다.
죽은 후에 다비다처럼 기억해 주길바래야 합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믿는 겁니다.
짐승이 영원을 생각합니까?
영원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죽음의 관문을 어떻게 지나가야 함을 묵상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베드로나 바디다나 동일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비다에게 새 생명를 주셨고, 그 생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삶의 방식이며, 다비다의 삶의 방식이고, 우리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세 번째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사람을 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열왕기상 18장에 기도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엘리사는 열왕기하 4장에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사랑하는 제자 나사로를 살리렸습니다.
본문은 베도로가 구약의 최고의 선지자와 같은 영적인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영적인 사역을 이어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과 등급으로 주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머문 곳은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43절이 가장 감동적인 베드로의 삶의 방식입니다.
다비다가 자기 집에 머물라고 강권하지 않았겠어요?
대접하고 싶은 마음으로 제자들이 초대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 사는 욥바에서도 가장 낮은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두장이 시몬은 외딴 해변에 살고 있습니다.
해변은 폐수처리가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에 붙은 짐승의 살을 긁어내어 염료로 처리해서 텐트를 만드는 직업입니다.
악취는 말할 것도 없고, 천민들이 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천민들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죽은 짐승을 다루기에 무두장이 자체가 부정한 인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시몬의 집은 부정한 곳이며, 악취가 나는 누추한 곳입니다.
가장 불편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전도하고, 기적을 행하고 쉬는 곳이 무두장이의 집입니다.
시몬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요한복은 21장은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러 다시 사명을 주는 장면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죽은 다비다를 일으킨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가장 낮은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냄새나는 추한 제자였지, 나는 평생 시몬으로 살아야지”라고 한 결심의 표현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시몬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고, 머물렀고,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서 고넬로가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앞에서는 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다 귀한 사람입니다.
차별이 없는 베드로의 삶의 방식입니다.
네 번째는 베드로의 전도방식입니다.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35절과 41절입니다.
베드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보고 믿었습니다.
사울은 헬라파 사람들과 변론했는데, 베드로는 보이니 믿게 됩니다.
불치병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아니라 볼 수 있는 삶으로 믿게 하라는 겁니다.
사는 것은 다 똑같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뭡니까?
기도 했더니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보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삶의 방식과 전도 방식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했던 일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된 제자입니다.
은혜에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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