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3~17
예수님은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30년 동안 살았던 고향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요단동편 베다니에서 세례를 받고, 또 장소를 옮겨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고, 다시 세례요한의 사역 장소에 돌아와 5명의 제자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자리를 옮겨, 갈릴리 작은 시골마을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든 첫 번째 표적을 행해셨습니다.
혼인잔치를 마친 후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기 위해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요한복음 2:12절에 이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가버나움에 선교센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고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을 포함한 그의 몇몇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공생애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성전 청결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3번의 유월절을 보내시고, 4번째 유월절 전날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4번째 유월절이 지난 다음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번의 유월절을 보내시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첫 번째 유월절에서는 ‘자신이 성전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셨고, 두 번째 유월절에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3번째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갈릴리에서 보내시면서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생명의 떡’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4번째 유월절 전날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유월절을 세 번 보내셨다는 의미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당시 성전은 사실 완전히 시장 같았습니다. 엄청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 보면 주변 일대가 성전 때문에 먹고 삽니다. 이같은 현상은 기독교뿐만 타종교 종교유적지를 방문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14~16절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쓰이는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세를 지불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좌판을 엎으셨습니다.
성전세는 20세 유대인 남자면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반 세겔을 내야 했습니다. 성전세는 두로의 화폐로 바쳐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화폐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가 새겨진 로마의 화폐를 대신 아무 형상이 없는 은으로 만들어진 고대 수리아의 화폐(두로의 화폐)로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유월절 19일전부터 환전소가 예루살렘에 설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내쫓으시면서 16절에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악한 먹이사슬이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대제사장의 임명권을 쥐고 있습니다. 로마총독은 대제사장을 자주 갈아치우면서 그 과정에서 막대한 검은돈을 받았습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제물사업을 독점했습니다.
고로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은 강력하게 구축된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몇몇 신실한 바리새인들이 구조적인 악을 지적했지만 예수님처럼 강력하게 행동하지는 안았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충격적이었고, 그에 대한 반응도 각각 처한 위치에 따라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대제사장에게 반기를 든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면 헤롯가문과 대제사장들은 골치 아픈 인물로 평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습니다. 자칭 의인으로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과 꾸짖음은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비로소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시편 69“9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제자들의 해석은 예수님이 성전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열정으로, 잠시동안 존재할 성전이지만 최대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잠시 후에 예수님의 육체로 성전을 대체해야 할 때가 오는데, 그 그때까지 성전을 깨끗케 하심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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