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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즐거운 곳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by ysong 2020. 8. 26.

요한복음 2:1~11

예수님이 광야의 흙먼지를 날리며 걸어가시는 발걸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제 세례요한의 사역 장소인 요단 동편 베다니를 출발한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립의 소개로 나다나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향한 가나는 갈릴리 호수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로, 나다나엘과 또 다른 제자 바돌로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나에 도착해서 혼인잔치에 참석할 때까지 나다나엘의 간곡한 초정으로 하루 그의 집에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1절에 사흘째 되는 날은 요한복음 1:43절 이후(베드로를 만난) 사흘이라는 뜻이기에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나사렛에서 출발한 마리아와 형제들도 혼인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볼 때 돌아가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즐거운 곳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혼인잔치는 무르익어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이주일 동안 진행되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흥겨워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3절에 포도주가 떨어짐입니다. 한창 흥이 오른 순간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낭패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곧 파장을 의미했습니다. 이제껏 지성으로 손님을 대접한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오히려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받을 판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곳, 그 곳에도 반드시 문제는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다고 그 문제가 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곳에 예수님이 계셨기에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들과 함께 돌아오고, 그들이 자기들의 확신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이야기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의 새로운 전기를 열렸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메시아인 예수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혼주도 아닌 초청받은 손님에 불과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어떤 기적을 통해 이들에게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이 4절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면서 거절을 합니다.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으로 버릇없는 표현처럼 번역되었지만 당시 2000년 전 헬라아 귀나이(귀네)’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여인으로, 여자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를 귀나이로 부른 것은 여기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부른(4:11)여자,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부른(8:10) ‘여자여,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시면 부른(19:26) ‘여자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천사가 부른(20:13) ‘여자여도 모두 귀나이(귀네)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칭호를 쓰신 것은 사적인 감정이나 관계에 선을 긋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어머니이지만 메시아의 일에 관여하면 안됩니다고 하는 단호한 선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표현에 마리아의 입장에서 서운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했지만 10달 동안 뱃속에 키웠습니다. 젓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입히고, 율법을 가르치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보호자의 역할을 감당했기에, 자신은 충분히 부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자여~’라고 부름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관계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이지만 죄인인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도 인간으로서 믿고 따를 여인이구나, 하나님의 일에 관여할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5:21~28에 기록된 말씀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을 자나가다가 만난 수르보니게 여자가 자기의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한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수리아에 사는 베니키아 여인으로 이방인입니다. 이 수르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를 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지르는 여인 때문에 힘들어진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을 하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며 거절합니다. 그런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를 때, 예수님이 대답을 합니다. “주여는 이방인과 관계에 해당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의 자손이여는 이웃집 아이가 나에게 아빠 만원만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여는 아저씨 만원만 달라고 하는 표현과 같습니다.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른 이후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어머니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때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집의 포도주나 책임지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라고 하면 십자가를 가리킵니다.(7:6,8,30; 8:20; 12:23), 요한복음 122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이 때는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기 6일 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셔서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영광을 받을 때를 비로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만왕으로 왕으로 받으실 영광의 때,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어 영광을 받을 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 것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함으로 마리아가 생각하는 때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때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메시아임을 당신이 요구하는 그런 식으로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밝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일입니다.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공개적인 기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긴박한 필요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그들 전부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자신에 대해 순종하는 소수의 자들에게는 드러내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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