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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더 많이 빚진 자

by ysong 2024. 3. 7.

누가복음 7:36~47

3주에 걸져 포도나무 비유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 사는 법입니다.

나는 없고 예수가 드러나는 삶을 사는 법입니다.

귀한 신앙의 열매를 맺는 통로의 삶을 사는 법입니다.

 

누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까요?

예를 들어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사람, 오랜 기도 제목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실감한 사람이 아닐까요?

5백만원 빚진 자와 5천만원 빚진 자가 모두 탐감을 받았다면 누가 더 감격할까요?

 

오늘 빚진 두 사람의 비유의 내용입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비유의 배경은 36~40절까지입니다.

41~42절은 비유입니다.

44~46절은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47절은 비유의 적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언제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갈릴리 가버나움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일차 갈릴리 전도 여행을 마치고 가버나움에 머물게 되았습니다.

이 일 후에 8:1절에 두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비유의 배경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로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지만, 예수님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은 진지한 진리 탐구의 의욕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 가운데 흠을 찾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말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잡으려고 초대했던 것입니다.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예수님을 고발하고 싶었던 의도였습니다.

 

그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요?

예수님을 대하는 무례함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문화는 손님을 환대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손님을 정성스럽게 환대 해주는 것이 예입니다.

기본적으로 손님의 발을 씻게 하도록 물을 떠다 드리는 것입니다.

손님을 더 귀하게 여긴다면 종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겨 줍니다.

샌들을 싣고 다녀서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인이 손님을 환영한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 주인이 손님의 볼에다 오른쪽 왼쪽의 불에 입을 맞춥니다.

그러한 입맞춤으로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다음에 손님이 앉으면 기름을 머리에 부어 드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손님을 환영하는 절차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이런 절차를 다 빼먹어버렸습니다.

그 절차들 가운데 지킨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발 씻을 물이라도 가져다드려야 할 터인데 그것도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단히 홀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44~4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에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날도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시 전까지 사람들이 뒤따라왔습니다.

이 여인도 대중 속에 섞여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비록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열린 대문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리새인의 문밖에서 예수님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뒤에 섰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등 뒤에서 울었습니다.

여인의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바리새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 줄 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예수님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가 전가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한 것이 전이 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을 향한 태도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각각 사회의 양극단에 속해 있습니다.

한쪽은 상류 계급으로 귀족적이고 도덕적으로 점잖은 쪽에 속합니다.

다른 한쪽은 가장 타락한 위치에 속합니다.

이 여인은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처지에 속합니다.

서로 왕래할 일도 없습니다.

도저히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을 수 없는 신분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영광의 주님을 초대하고 푸대접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대하여 감격한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자기의 집에 초대한 삭개오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신 은혜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편견으로 가득한 바리새인을 고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죄를 지은 여인이나 하나님 앞에 빚을 진 자들임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시몬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빚을 지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빚 준 사람이 이들의 사정을 알고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묻습니다.

누가 더 마음에 고마움이 있겠느냐?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는 바리새인을 상징합니다.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는 여인을 상징합니다.

바리새인은 이 여인과 같은 그러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바리새인은 내가 죄인은 죄인이지만 이 여인과 같이 추한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와 같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했던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세상에 둘도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44~46절까지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바리새인과 여인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편견으로 가득한 바리새인 시몬을 책망하는 내용은 너무나 평범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도덕적 상태가 어떤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지켜야 할 손님에 대한 예의를 얼마나 지키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너는 발을 씻을 물을 갖다주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고, 향유를 머리에 바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도 지키지 못하면서 신학을 알고, 율법을 알고, 도덕을 알면 무엇하겠느냐고 묻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차돌같이 단단히 굳은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신종 바리새인들이 참 많아 보입니다.

의인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그들의 심령은 온유함이나 부드러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묵상도 하고, 성경도 많이 읽는데,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비싼 향유를 갖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 발을 씻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이 따라붙지 않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따지지 않습니다.

여인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예수님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다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사랑에는 조건이 따라 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사랑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사랑이 많으냐?

조건 없이 빚을 탕감받은 까닭입니다.

조건 없이 용서받은 까닭입니다.

너희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참으로 고귀하고 거룩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구원이 임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껄끄러운 초대에 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의 푸대접에도 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사랑하신 만큼 이 바리새인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건지신 것처럼 바리새인도 건지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 더 가까울까요.

바리새인일까요? 죄를 지은 여인일까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접하면 나는 다윗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으면 복에 해당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라새인에 가깝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용) 여인과 같은 마음을 갖자.

감동이 없어졌습니다.

눈물이 말랐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예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을 뿌리고

부끄러운 나이지만 나를 구해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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