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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완성)

품위 있는 신앙생활

by ysong 2023. 3. 28.

고린도전서 14:1~5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나게 될까요?

품위 있는 신앙생활로 드러납니다.

 

12장은 다양한 은사를 다루었습니다.

12:31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 사랑을 말씀했습니다.

지난주 15가지로 표현된 사랑을 배웠습니다.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구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선물로 준 은사를 빛나게 합니다.

이 사랑이 일상의 삶과 섬김과 나눔과 헌신의 은사를 빛나게 합니다.

 

14장에 다시 방언과 예언의 은사의 장단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은사가 어떤 신앙열매를 맺는가를 말씀하고 싶어서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은사는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신앙생활로 드러납니다.

 

살다가, 일하다가 품위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품위 있는 사람은 돈도 있으면서 겸손하고 예의 바른 분들일 겁니다.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하는 말과 행동에서도 품위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아랫사람을 대해는 태도에서도 품위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졸부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돈이 있는데 품위가 떨어진다는 이유입니다.

특히 졸부들이 돈의 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기 때문일 겁니다.

소위 갑질논란도 여기에 속한다고 봅니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에 품위가 없어서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꼭 이런 졸부를 닮았습니다.

한국교회도 물질과 은사를 많이 받았는데 졸부와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풍성했습니다.

다양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졸부처럼 은사를 받지 못한 교인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했습니다.

이런 행동이 교회의 품위를 떨어지게 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14:40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은사는 품위 있는, 질서 있는 신앙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한 내용을 통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신앙생활인지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무질서는 품위를 떨어뜨립니다.

고린도교회 예배는 고정된 순서가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애찬과 성찬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교인들이 시험들기도 했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배 중간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말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자기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며 1~2시간씩 말을 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예배가 무질서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끼리 다툼과 자랑으로 화평까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무질서는 품위를 떨어뜨립니다.

왜냐하면 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윗사람에게 잘하라고 하는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최초로 그 질서를 깬 사람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질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무질서인 죄가 사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 부부간의 질서, 형제간의 질서, 사람과의 질서가 깨지면 화평이 깨집니다.

질서가 깨진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과 화평이, 사람과의 화평도 깨졌습니다.

품위는 질서를 지키고 인정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예배의 질서를 깬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유로 품위 있는 신앙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사랑을 추구하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과 친밀함 교제를 누리는데 이익이 많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다 좋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집니다.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렇다고 방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입니다.

바울도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듯이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방언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면 아주 길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신도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의식을 가지고 하는 기도입니다.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익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을 자랑처럼 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방언은 무질서의 원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훼손시켰다고 봤습니다.

 

바울은 7~11절에서 방안의 단점을 실례와 비유를 사용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기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악기가 제대로 화음법칙에 따라 소리를 내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멜로디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만을 냅니다.

 

나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소리로 불면 사람들이 전진하기도, 후퇴하기도, 취침하기도, 기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소리를 되는 대로 불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언어가 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서 말한다면 그 만남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언은 좋은 은사입니다.

모든 고린도교인들이 사모했던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깨끗한 옷은 더러워지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잘못 사용한 방언 은사는 예배를 무질서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방언 은사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습니다.

무디바이블스쿨로 유명한 남침례교는 방언 은사 증지론을 주장합니다.

반대로 순복음과 같은 오순절 계통은 방언 은사를 강조합니다.

장로교는 중도적인 입장입니다.

 

몇 년 전에 방언을 녹음해서 일반언어학자가 분석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 분석에 따르면 방언은 문법체계가 없지만 말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마디 말을 반복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학자들은 방언을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경우로 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께 간절한 표현을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내 방언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분별할 것을 조언합니다.

먼저 자신의 방언을 하는 상태가 황홀경이나 아니냐를 따져 보라고 합니다.

무당이 작두 위에 뛸 때는 황홀경에 빠지는 것과 같으면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자기의 의식을 가지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방언은 초대교회 때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성령감림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 방언은 외국어방언입니다.

각자의 언어로 알아들었던 방언입니다.

16개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이 한국어로 했는데 그 나라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간증을 듣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 방언은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는 자신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방안으로 기도할 때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영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성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성이 깨어서 하는 기도가 영적인 기도입니다.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영으로 기도하면 아멘(저 기도는 나의 고백이며 내용은 전부 맞습니다.)할 수 없습니다.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한 사람은 스스로 흡족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랑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으면 이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17~18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1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차례대로 질서 있게 하라고 합니다.

방언의 통역을 두어 교회의 덕을 끼치라고 합니다.

품위는 교회의 덕, 공동체의 덕을 끼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지금도 방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강력하게 나타났던 방언이 중간에 없었다가 20세기 들어서 성령은사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20세기에 오순절 성령파의 약진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남미, 아프리카에서 강력한 성령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과 예배를 드린 목사님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와 맞지 않다고 합니다.

약간은 무질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혹시 방언 은사가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할 것을 권면합니다.

19절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리치는 것입니다.

지금의 설교라고 하기도 하지만 진리를 앞장서 말하는 은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예언은 방언보다 교회 전체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3가지의 이익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예언은 교회의 덕을 끼칩니다.

덕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데 돕습니다.

 

권면이 있습니다.

권면은 충고입니다.

바른 방향 제시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게 하는 것입니다.

품위는 덕, 권면, 위로로 드러납니다.

성도들의 품위와 질서는 어느 때 가능할까요?

20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에는 유치한 아이가 되면 안됩니다.

악에는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은사를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생각하는 것, 깨닫는 것, 바른 마음을 지니는 것)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과 깨달음이 달라지면 마음가짐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장성한 사람은 27~32절의 행동을 합니다.

- 질서를 지킵니다.

- 통역을 하게 하라(분담합니다.)

- 자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 분별합니다

- 가르칩니다.

- 자기를 통제합니다.

품위는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40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고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질서와 조화의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는 질서와 화평에서 나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질서가 깨집니다.

 

적용)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나의 행동이 덕이 되고 있는가?

나를 자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드러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질서가 깨지면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명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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