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1~13절
11~14장은 예배 시간에 시험이 들게 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너울은 쓰는 것이나, 애찬이나, 은사는 신앙생활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좋고 선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이 오히려 예배를 방해했습니다.
좋고 선하다고 했던 행동이 상대방에게 시험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도가 좋다고 해서 결과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의도로 행동했는데 상대방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통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좋고 선한 은사에 무엇이 빠졌기 때문일까요?
더 큰 은사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12:31절에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언급하고, 14:1절에 “사랑을 추구하면서 은사를 행하라”고 합니다.
더 큰 은사는 바로 13장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13장의 사랑은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경쟁과 시기, 분열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쓰여지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13장은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고린도교회를 위한 처방으로서 사랑입니다.
1~3절에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은사를 나열한 이유입니다.
사랑은 각종 은사를 빛나게 합니다.
1절에 사랑이 없는 방언과 천사의 말은 울리는 구리와 꽹과리가 됩니다.
울리는 구리와 꽹과리는 이방 신전에 사용된 제기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노랫소리입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이방 신전에 사용되는 제의와 같고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방의 제의와 같습니다.
2절 예언, 능력, 지식, 믿음이라는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절 구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구제는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이 됩니다.
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노고처럼 자신을 풀무 불에 내어 줄지라도 자기 공명이 됩니다.
1~3절에 나열한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사랑은 뛰어난 은사의 존재 의미를 알려줍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은사로 시험을 받는 이유는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섬김과 봉사에 시험을 받는 이유는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무기력한 이유는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가정, 교회공동체를 유지하는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식, 깨달음, 방언, 구제, 섬김에 어떻게 이 사랑을 담아낼지 고민해야 합니다.
직장생활에서 자신의 은사를 어떻게 사랑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직장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은사를 빛나게 합니다.
은사를 빛나게 하는 사랑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요?
4~7절까지 15가지 사랑의 특징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에 자신을 이름을 넣고, 반대로 읽으면 딱 자신이 아닙니까?
사랑에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면 딱 맞지 않습니까?
이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남녀의 사랑으로 살펴보면 15가지 사랑의 특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고로 시작해서 견디느니라 끝나는 것을 볼 때 남녀의 사랑은 분명히 아닙니다.
15가지의 사랑의 특징을 간단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깨지지 않습니다.
가정, 교회는 기다려 주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친절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랑을 표현할까요?
4단계로 진행되고 4단계의 결과로 표현됩니다.
1단계로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모두 비교에서 나옵니다.
그릇된 경쟁의식에서 나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첫출발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2단계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비교할 일이 없으니 자랑할 것도 없어집니다.
3단계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을 자랑 할 일이 없으니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풀무질을 하는 것처럼 실제의 자기보다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4단계로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니까 무례히 행하지 않게 됩니다.
무례는 맘대로 행동하고 상대방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헌신이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단계 시기하지 않은 결과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방식을 고집하지 않게 됩니다.
2단계 자랑하지 않은 결과는 성내지 않게 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할 일이 없으니 성내지 않게 됩니다.
3단계 교만하지 않은 결과는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악한 생각은 상대방의 잘못을 적어 놓았다가 꺼내서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는 이런 스타일이 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조금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노트에 적어두지 않습니다.
4단계 무례히 행하지 않은 결과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진리 때문에 기뻐함), 참고(모든=덮어주다), 믿으며(항상 신뢰하고, 사람은 믿어 줄 때 변함), 바라며, 견디(수용)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그와 함께 소망하는 것입니다.
13장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페는 동시에 초대교회의 애찬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4~7절의 사랑은 애찬을, 은사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그 사랑이 공동체를 든든하게 건강하게 합니다.
13장은 사랑은 의지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배우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8~13절)
8절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이 왜 영원할까요?
요일 4: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서로 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천국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이 땅에 선취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이 자랑했던 예언, 방언, 지식은 유한합니다.
말씀인 하나님의 앞에 있어서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인간의 말이 필요 없고,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그리고 그 어떤 은사도 한시적입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의 가르침이나 권면도 섬김이나 나눔이나 자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결핍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숙하게 합니다.
우리의 수준은 9절의 말씀처럼 부분적입니다.
인간, 사회, 자연, 하나님에 대해서도 부분적입니다.
우리의 상태는 12절의 말씀처럼 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는 구리생산지역입니다.
청동구리로 만든 거울은 희미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부분적이고 희미할 뿐입니다.
정확하고 명확하게 알 때가 옵니다.
그 시기는 10절의 말씀처럼 온전한 것이 올 때입니다.
마지막 종말이 올 때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이든 우주적인 종말이든 육체로부터 벗어 나는 때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때입니다.
성장이 그칠 때가 옵니다.
성장이란 무엇일까요?
성숙은 무엇일까요?
11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전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가 키가 큰다는 것은 어제의 상태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전의 사랑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랑을 버리고 나를 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12절의 말씀처럼 미성숙으로부터 성숙,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조각 조작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주께서는 나를 아는 것처럼 그 분의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됩니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같은 구원의 이루는 통로로서 믿음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 믿음은 없어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영원합니다.
천국에 들어갔으면 소망이 이뤄졌지만, 하나님을 영원히 소망하는 것은 계속됩니다.
천국의 공동체도 기본적인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합니다.
13장은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더 큰 은사로 섬기고 싶으면 이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배의 모임이 유익하려면 이런 사랑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우리들의 관계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적용) 이런 사랑으로 아시나요?
은사를 빛나게 하는 사랑으로 사시나요.
의지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시나요.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나요.
4~7절까지 언급한 15가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능력, 권력, 돈인가요?
중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기쁨과 불행은 짧습니다.
이것으로 이뤄진 사람 관계라면 쉽게 깨어집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알 때 가능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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