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17~34절
그동안 8~10장까지 타인을 위한 절제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잘 배우셨죠.
절제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절제는 없습니다.
타인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는 절제가 몸이 배길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마음이 상한 경험을 한 두 번 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조용히 새벽에 기도하는데 크게 기도하는 분으로 인해 개인 기도에 방해받은 경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예배드리는 분으로 인해 불편했던 경험,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며 비켜달라고 하는 분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경험, 자신은 더운데 춥다고 하는 분으로 예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경험 등.
또 한국교회도 예배에 따른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풍금을 쳐도 되느냐? 피아노를 쳐도 되느냐?
주일에 돈을 쓸 수 있느냐?
세상의 악기인 드럼을 칠 수 있느냐?
주일에 각종 교회 행사를 할 수 있느냐?
지금도 예배와 관련된 토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에서는 우리보다 더 혼란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로마교회는 예배드리는 날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토요일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주장했습니다.
우리와 내용은 다르지만 예배 중에 마음이 상한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1~14장은 예배 중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마음이 상한 경우입니다.
어느 정도일까요?
17절을 보면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예배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가 될 정도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예배 모임이 해로움이 된 사례는 무엇일까요?
대표적인 사례는 3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에 여자분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
애찬 시간에 더 먹었느냐 먹지 못했느냐?
좋은 은사와 더 좋은 은사로 나뉜 은사의 차별입니다.
지금은 여자분들이 예배 중에 모자를 쓰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고린도교회처럼 애찬과 성찬이 동시에 진행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이 문제로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권면했을까요?
바울은 예배 질서 차원에서 권면했습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닫게 되는 은혜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첫째 세상이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에 관한 사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남녀가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녀가 한자리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제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갔을 때, 유대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유대인도 우리처럼 큰 소리를 지르며 기도했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회를 인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만 있었습니다.
여자분들은 가림막으로 막은 뒤편에서 기도했습니다.
사모님들이 여자분들이 하는 기도회를 봤습니다.
여자분들은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은 남녀가 따로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자분들이 은혜를 받고 머리에 쓰던 너울을 벗어 버리고 방언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여자분들도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았습니다.
너울은 나는 머리가 아니다, 내 위에 누가 있다, 남자가 내 위에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이를 굴종의 표시로 여기고 너울을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여성이 너울을 벗는 것에 불편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외출 시 반드시 너울로 머리를 가렸습니다.
당시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여성 노예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았습니다.
창녀들도 너울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성여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남자를 거부하고 여자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머리에 너울을 썼습니다.
이로인해 세상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2~16절에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바울은 13절에 신앙적인 이유로, 14절에 본성적인 이유로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교회를 창기 집단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녀를 동등하게 창조했지만 사회 인식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마음이 닫히게 해서 전도의 문이 닫히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웃에 피해를 주지 말고, 불편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두 번째는 애찬에 마음이 상한 사례입니다.
먹는 문제로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코로나로 3년 동안 교회들은 주일 점심을 먹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풀리면서 교회들마다 주일 점심을 먹는 게 좋은가, 먹지 않는 게 좋은가를 놓고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중형교회는 중형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각각 모양은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입니다.
저는 그동안 식사에 대한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점심을 먹었기에 전통적으로 익숙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제를 위한 애찬으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배경은 21~22절입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당시 예배는 주로 저녁에 드려졌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7절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는 것은 예배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배 때 애찬과 성찬과 말씀이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랫동안 말씀을 강론하는 바람에 유두고가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가 떨어져 죽게 됩니다.
유도고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게 되어 은혜가 넘치는 집회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애찬과 성찬과 말씀 강론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교회당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몇몇 부자의 집에서 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애찬 한 후에 성찬을 했습니다.
이어 사역자가 말씀을 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부유한 집의 구조를 독특합니다.
9명 정도가 식사를 할 수 있는 트리클리니움과 3~40명이 서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뜰과 같은 아트리움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도착한 상류층 부자들은 트리클리니움에 둘러앉아 애찬을 즐겼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온 좋은 음식과 술을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포도주에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교인은 일을 마치고 늦게 도착했습니다.
주로 노예와 가난한 사람은 애찬시간에 맞춰서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아트리움에 서서 빈약한 음식으로 애찬을 나누거나 아예 굶기까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제를 위한 애찬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차별로 나타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배가 고프게 되니까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두 가지 측면에서 권면합니다.
첫째는 성찬을 하듯이 애찬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23~26절에서 성찬의 의미를 설명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포도주와 빵으로 성찬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6:26절~28절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찬은 예수님이 마가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애찬을 했습니다.
애찬을 하다가 빵과 포도주를 떼어 나누어 주는 성찬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애찬을 20절에 “주님의 만찬”이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바울은 애찬이 성찬과 같은 의미로 기억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애찬은 성찬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듯이 사랑하고, 섬기며, 나누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나눔은 붙어 있습니다.
발을 씻는 것과 애찬과 성찬은 붙어 있습니다.
바울은 애찬을 성찬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코이노니”와 “그리스도의 피의 코이노니아”로 여겼던 것입니다.
애찬도 성찬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애찬이 이런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교제와 섬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형편에 따라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행해지는 애찬의 의미는 알고 있어야겠습니다.
두 번째 권면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33~34절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절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없는 자, 연약한 자를 기다려 주는 것이 성찬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거든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남을 실족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간단한 해법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울은 애찬과 관련하여 영적인 권면과 실천적인 권면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사귐과 친교의 애찬이 만찬과 말씀을 듣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것으로 인해 예배 시간에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합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강조합니다.
적용) 예배 시간에 시험 들게 하지 않도록 서로를 살펴요.
오래된 교회는 자기 자리가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자기 자리에 앉았다며 비켜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마음이 상해서 이럴 수 있느냐며 따져 물었습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도 시험을 들게 됩니다.
애찬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듯이 사랑하고 섬기며 나누는 자리가 되도록 힘쓰라고 합니다.
사랑과 섬김과 나눔은 붙어 있습니다.
발을 씻는 것과 성찬은 붙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로 은혜 받도록 서로를 살피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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