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2~20절
고린도전서는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신앙적인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생긴 분파에 관해서는 사람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라나 게바나 다 그리스도의 종에 불과합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로 심각한 문제는 음행이었습니다.
5장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심각한 사례, 6장에 자유를 잘못 적용한 사례, 7장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 음행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음행은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음행은 파괴력이 대단합니다.
일순간에 개인과 가정이 망가뜨립니다.
안타깝게도 지도자가 음행의 문제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교회 성도와는 무관한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입니다.
5장에서는 음행을 적은 누룩으로 비유했습니다.
누룩은 아무리 적어도 모든 것을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단호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음행에 틈을 주면 안됩니다.
상황과 만남을 만들면 안 됩니다.
다윗처럼 음행할 수 있는 상황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요셉처럼 유혹을 뿌리치고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목사님들이 운전석 옆에 아내 이외의 어떤 여성도도 태우지 않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자유에 대해 잘못된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준 자유에 어떻게 적용해야 바른 것인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자유는 광범위한 영역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나올 자유도 있고 안 나올 자유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자유도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자유는 사소한 일상부터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생활은 이런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당시 고린도는 시대적인 배경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극심한 쾌락 풍조로 성도덕이 문란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철학에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을 분리합니다.
영혼은 고귀하고, 육체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음란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방종교는 이런 행동을 정당화해 주었습니다.
특히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여 사제만 1천명에 이릅니다.
여 사제라고 하지만 사실은 공창들이었습니다.
남자들이 제사를 드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성의 쾌락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전에는 그들이 바치는 제물로 넘쳐났습니다.
신전에서 소비하지 못한 제물이 시장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8장에 고린도교회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가 생긴 이유입니다.
철저히 남성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음행을 어떤 식으로 정당화했을까요?
이는 바울의 가르침이 한몫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창조주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고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 할례로부터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아쉽게도 고린도교인들은 바울로부터 배운 자유를 잘못 적용하게 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몸으로 무엇을 하든 관계없다는 식으로 적용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유를 내세워 이런 음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고린도교인들은 이것을 가장 진보적인 의견이라고 우쭐대었던 것입니다.
13절에 말씀처럼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식과 배는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로 봤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체는 본능을 위해 있고, 성행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교인의 모습은 우리 시대와 닮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시대 풍조는 “네 맘대로 해”가 아닙니까.
이를 육체적으로 맘대로 해도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육체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고, 육체를 어떻게 굴리든지 상관이 없다는 식이지 않습니까?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음란 사회가 아닙니까?
고린도교회의 실수처럼 한국교회도 실수한 것은 아닐까요?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로 봤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기에 단서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12절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이 되지 않습니다.
자유는 유익과 덕에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안마다 유익에 대한 말씀을 여러 군데에서 언급한 이유입니다.
10:23절에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2:7절에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덕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14:3, 4, 5, 12, 17, 26절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의미로 8:1절에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13장에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배경입니다.
덕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하나의 또다른 표현입니다.
이는 음행, 우상의 제물, 은사에 대한 권면의 내용입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일한 권면은 덕을 세우는 것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유가 교회공동체 세우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 배려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서는 유익과 덕이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12절의 말씀처럼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과 사물에, 돈과 명예에, 각종 중독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몸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아 줍니다.
바울은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했던 몸은 누구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13절에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몸은 주님을 위해 있습니다.
주님은 몸을 돌보십니다.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든 분의 것입니다.
내 인생, 낸 몸이 내 것이 아닙니다.
위탁받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 43:1~2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막과 불 가운데서 안전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시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깨어지는 고통이 따릅니다.
내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갔습니다.
자기 맘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본능적인 욕구, 인기와 인정이란 몸에 대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은 21: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내 인생, 내 몸, 내 계획조차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된 지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머리이고 우리는 팔, 다리와 같은 지체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절에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몸이 주님의 것인데 창녀의 지체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창녀와 한 몸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음행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죄입니다.
우상숭배와 동일시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몸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기에 중요합니다.
19절입니다.
3:16~17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더 이상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몸이 성전이 되어 거룩을 유지해야 합니다.
몸을 아름답게 가꿔야 합니다.
로마서 8:9~11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에 따라 살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값으로 산 것입니다.
몸짱이 유행합니다.
남자들은 근육을 자랑합니다.
여성분들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합니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이 볼 때 좋아서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렇게 가꾼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20절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덕을 세우고, 유익을 위해 몸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정리될 때 진정한 자유로운 자가 됩니다.
욕망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자가 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자유로부터 출발합니다.
자신도 십자가로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리는데 자유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기여해야 합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유가 아니고, 율법에 따르면 율법의 종이 됩니다.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참 의미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적용) 우리의 몸은 비쌉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배를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배를 위해서만 살면 안됩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이 생명으로 값을 치러서 비쌉니다.
비싼 몸이기에 치장하기 위해 배를 위해서만 살면 안됩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 위탁받았습니다.
비싸기에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몸을 아무렇게나 다루면 안 됩니다.
잘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별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죄에, 시대 풍조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시대적 풍조를 거스를 힘이 필요합니다.
철저히 말씀 앞에 설 때 몸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비싼 몸으로 잘 사용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비싼 몸을 주님께 내어드림을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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