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1~13절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어지면 덩달아 질문도 많아집니다.
현실 속에서 부딪치는 일들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싶어 합니다.
신앙의 실력으로 분별이 힘들어서 생기는 질문들입니다.
7장부터 14장까지는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에게 물었던 신앙상담 내용들입니다.
8, 9, 10장은 우리와 관계없는 문제입니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고기들은 고린도 시대처럼 신전에 바쳐진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지난주 7장에서 다룬 결혼의 문제도 그겋습니다.
음란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고민이 담긴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결혼, 이혼, 재혼, 독신에 관한 물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신앙 체험을 통해 깨달은 것으로 상담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참고해야 할 교훈입니다.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좋은 신앙의 상담자가 되길 바랍니다.
8장도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에게 물었던 신앙상담의 내용입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어도 좋으냐, 좋지 않으냐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어떤 편이 좋은지 분별하기 어려워서 논쟁이나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고린도교인들은 고기를 먹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레위기와 같은 율법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고린도교인들은 성경 지식으로 인해 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는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담배와 술에 관한 논쟁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상담해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울이 대안으로 제시한 타인을 위한 지식의 절제에 관해 함께 생각하고 적용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고기를 먹는 문제가 심각해진 배경이 있습니다.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불가결한 생활의 일부입니다.
고린도를 비롯한 대부분 도시들은 두 종류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적인 제사와 공적인 제사입니다.
제사에 드려진 동물을 모조리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적인 제물인 경우 세 부분의 나누어 집니다.
제물의 지극히 적은 부분만 제단에 태워졌습니다.
심하면 동물의 머리털 몇 개를 뽑아서 태울 정도였습니다.
다음으로 제사장이 갈비와 다리와 머리의 왼편 반쪽을 가져갔습니다.
셋째로 제물을 바친 사람이 남은 고기를 가져갔습니다.
그 고기를 갖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주로 결혼 잔치에 사용되었습니다.
제물을 바친 사람의 집에서 잔치를 베푸는 수도 있고, 신전에서 잔치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로 잔치상이 차려졌습니다.
길드라는 상인조직에서도 이런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함께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사회생활과 사업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습니다.
공적인 제물은 국가가 바치는 것인데 이런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약간의 제물만 태우고, 제사장이 몫을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관리들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남은 고기를 상점이나 시장에 팔았습니다.
제사장은 남아돈 고기를 시장에 팔았습니다.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것에 꺼림칙하게 여긴 이유입니다.
고기를 먹지 않은 교인들이 고기를 먹는 교인을 비판했습니다.
고기를 맘대로 먹은 교인들은 성경의 지식을 내세웠습니다.
일상적이며 사소한 일이었지만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했던 것이 분란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고기를 맘대로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한 성경의 지식은 어떤 내용일까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4절과 6절입니다.
4절“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6절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우상 제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은 신이 아니고 나무조각이나 금속조각에 불과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가장 대접을 잘 받는 것이 우상입니다.
살아 있는 신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고기를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확하고 명확한 신학적인 지식입니다.
그들의 지식은 하나도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가 되었을까요?
4,6절의 지식이 갈등의 원인이 된 이유가 뭘까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알아갈수록 교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안다는 것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다릅니다.
신학박사가 되어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지식이 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혼란케 합니다.
그 지식으로 자신도 넘어지고 타인도 넘어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린도교인의 지식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그 지식에 빠진 게 있습니다.
1절에 타인의 덕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빠지면 교만하게 됩니다.
자기만큼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거나 스스로 우월감을 빠질 수 있습니다.
또 그 지식은 7절, 9절, 11절에 지식이 없는 약한자에 대한 배려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식은 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고,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술과 담배를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가 한 만만 마시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유혹을 뿌리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술과 담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몰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지만 어떤 죄의식이나 꺼림칙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 지식에 사랑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적인 체험에 대한 지식도 비슷합니다.
스스로 높은 수준에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면서 독선적이고 누군가를 힘들게 합니다.
사랑을 없는 영적인 지식도 누군가를 정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지식은, 신앙 체험은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됩니다.
분석하고 연구한다고 한들 알 수 없습니다.
정보와 지식으로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알게 됩니다.
지금 고린도교인들의 지식은 그 사랑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교인들의 지식은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사랑이 빠졌습니다.
종교가 수행의 목적으로 특정 음식을 금합니다.
종교적인 완성과 음식을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힌두교는 소를, 회교와 유대교는 돼지고기를, 불교는 채식을 먹습니다.
기독교는 음식을 금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음식이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음식을 더 먹는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덜 먹는다고 해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은 건강하게 먹으면 됩니다.
음식은 구원과 관계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주초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처음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면서 금해왔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술과 담배로 찌들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술과 담배를 금했던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아편을 금했습니다.
분당의 어느 감리교회는 몇 년 전에 흡연실을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더라도 교회를 나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담배를 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흡연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술과 담배는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권덕사항입니다.
바울은 사랑이 빠진 지식으로 덕을 세우지 못한 이들을 향해 어떻게 상담해 주었을까요?
첫째 자유를 절제하라고 권면합니다.
9절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이 있는 자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약한자를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내가 신전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약한자가 나의 행동을 보고 넘어지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자유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이용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찾기 위해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끼치는 유익과 덕을 고려합니다.
타인을 배려한 자유입니다.
내 믿음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을 넘어지게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지식과 자유는 11절에 약한 자를 멸망하게 합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됩니다.
그 사람은 지식이 없기에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게 됩니다.
그 사람은 우상에 매여 살게 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약한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지식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결심이기도 한데요, 형제를 실족하지 않도록 절제하라고 권면합니다.
12~13절입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나로 인해 타인이 넘어지게 하지는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바울은 타인을 위한 절제를 합니다.
타인이 실족하게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안 먹겠다고 결심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베려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엡4: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 사랑 안에서”이것이 제일 우선하는 기준입니다.
로마서 14: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 희락, 평강에 있습니다.
이는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것 들입니다.
신앙의 기준을 지식에 두지 말고 사랑에 두라고 합니다.
지식을 너를 위해 쓰지 말고 타인을 위해 쓰라고 합니다.
적용) 타인을 위해 지식을 절제합시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하면 신앙이 깊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고 지식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성숙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도 성경 공부를 남다른 열심을 갖고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스스로 볼 때 생각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사역한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교회를 힘들게 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제자교육을 받았다고 자랑하시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한다고 합니다.
저나 제자훈련을 받았다고 자부한 성도나 무엇이 부족한가요?
지식이 덕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지식에 사랑이 빠졌습니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양보하는 것으로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지식에 이르지 못한 자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뭘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시험들 수 있습니다.
희생, 진실, 지식이 사랑과 분리되면 자기 의로, 우월감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교만합니다.
바울은 타인을 배려한 고상한 절제를 결심했습니다.
온전한 지식은, 온전한 신앙 체험은 사랑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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