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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일설교

again start

by ysong 2023. 1. 4.

요나 1:1~2, 3:1~4

올해도 결심하고 약속한 것을 100%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결심을 하면 50% 이상은 이루게 됩니다.

지난해 성경을 읽고 쓰고 행하자로 정하고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바쁜 생활 가운데 최소한 1권 이상은 쓴 줄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서 성결필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개인적으로 시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필사가 다시 생각이 나면 언제든지 멈춘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말씀되신 주님과 동행의 인생을 누리면 됩니다.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올해 표어는 그래서 again start로 정했습니다.

교회적으로 10년이라는 작은 매듭을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0년 되돌아보면 부족한 점도 많았고,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올해는 다시 출발하는 원년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묵상하던 중 요나서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먼저 생각난 것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실패했다고, 한 번 불순종 했다고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요나를 다시 사명의 자리로 세우셨습니다.

앞으로 10년을 향하여 우리들을 요나처럼 다시 사명으로 자리로 세우시고 싶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시작했다고 멈춘 신앙적인 결심, 봉사, 섬김, 일상의 변화, 사업 등등을 다시 시작하라는 용기를 부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요나서 1장과 3장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을 살피면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나는 누구인가?

요나 선지자는 정말 평범한 선지자였습니다.

아밋대라는 갈릴리에서 4~50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출신입니다.

직전에 활동했던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동일 시대에 활동했던 제사장 출신의 호세아 선지자처럼 특별한 영적인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창녀와 결혼하라고 한 말씀에 순종한 호세아 선지자와 달리 요나선지자는 고집이 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요나는 평범하지만 고집 센 사람의 모델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명과 두 번째 사명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첫 번째 사명을 받은 요나는 무엇을 했나요?

불순종과 내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첫 번째 요나가 취한 행동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한 니느웨는 갈릴리에서 80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북부 모술지역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정반대 반향으로 향했습니다.

3000km 떨어진 다시스로 지금의 스페인 남단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의 첫 번째 실패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생각대로 판단하는 불순종이었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이 옳다는 고집입니다.

 

두 번째 요나가 취한 행동은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3절에 일어나 욥바로 내려갔더니, 배에 올랐으나 하나님이 큰 바람을 내리시고, 5절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고,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더 내려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15절 바다에 던져지고 17절 물고기 배 속으로 내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추락은 날개가 없다는 말처럼 요나는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인생은 곧 내려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내려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은 요나는 더 내려갔습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불순종과 내려가는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큰 성 니느웨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주변국가를 침략하여 괴롭힌 나라이었습니다.

피의 성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악랄하고 호전적이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죽도록 싫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게 악행을 행하고, 죽이고, 멸시했는데 용서 받도록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가 죽도록 싫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걱정은 오히려 내가 복음을 전했을 때,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어떡하나?’

이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저런 놈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안 돼. 저렇게 나쁜 짓을 한 놈들이 회개하면,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용서하실 텐데. 그러면 안되지. 저렇게 그냥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자!”

이것이 요나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까?

그 소식을 들으면 영원히 살고, 자유롭게 되고, 행복해지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요나의 심정은 이와 같습니다.

 

요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니느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느니웨는 누구입니까?

자신에게 상당한 피를 입힌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당한 상처를 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느니웨는 자기 자신일 수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처럼 편협한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편협한 이기주의입니다.

요나는 내 민족만 회개하고, 내 민족만 복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민족주의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뛰어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가족만 구원받고, 내 가족만 복 받고, 내 가족만 쓰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2장의 물고기 뱃속에서 하는 기도도 이기적인 내용입니다.

내가가 참 많이 사용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것이 바로 요나의 큰 성 느니웨입니다.

자가 밖에 모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동일한 행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1:2절과 3:2절에 동일하게 반복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쳐라입니다.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불순종을 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두 번째는 3절의 말씀처럼 순종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절반의 순종입니다.

아니 1/4의 순종입니다.

그러나 순종으로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절반이어도 좋고요, 1/4도 좋아요.

순종하기 위해 일어서길 바랍니다.

 

두 번째 갔습니다.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는 내려갔는데 두 번째는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느니웨로 들어간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각자 갖고 있는 느니웨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기적인 느니웨, 편협한 느니웨,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느니웨, 신앙적인 게으름이라는 니느웨, 염려라는 니느웨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 번째에 하나님이 누구인지 말했습니다.

1:9절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줄 알고 있습니다.

지식의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젠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비록 소극적이지만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지적인 수준에서 의지적인 결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나는 1장과 3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일하셨습니다.

선포한 내용도, 쓰시는 사람도 동일했습니다.

요나가 가기 싫다고 해서 다른 선지자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근도 동일합니다.

첫 번째 사명의 자리에서 두 번째 사명의 자리로 옳기실 겁니다.

변화시켜서, 고통을 주셔서, 다시 순종으로 자리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어 자신의 쫀쫀함에 입을 다물게 하실 겁니다.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세계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불신자까지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반겨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는 니가 키우지도 않은 박넝쿨이 죽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이 니느웨 성읍에는 장정들만 십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어찌 불평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논리가 맞지 않습니까?

너는 사소한 것도 그렇게 아끼면서,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을 아끼는 것에 대해 뭐 그리 불평이 많냐는 것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요나서의 마지막이 일반 책과 비교할 때 이상하게 끝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요나가 회개했다, 기타 등등의 이야기가 없이 갑자기 끝납니다. 그것은 요나가 깊이 깨닫고 할 말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적용) 10년을 향해 다시 일어납시다.

이전의 요나는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이전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의 요나는 큰 성 느니웨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전의 죽도록 싫어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젠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요나는 입을 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이젠 요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예배에서 동일한 단어가 있습니다.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먼저 자신의 느니웨를 벗어나기 위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우리는 10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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