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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네가 진정으로 낫고자 하느냐?

by ysong 2022. 7. 24.

요한복음 5:1~9절 

자비의 집인데, 자비가 없는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진을 치고 누워 있습니다.

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이 없습니다.

자비의 집인데, 일등만 기억되는 치열한 경쟁이 숨겨진 곳입 니다.

38년 된 병자는 안식을 잃어버린 종교생활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38년 병자는 악한 죄의 결과로 질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이런 죄를 혈기왕성한 10~20대에 저질렀다면 그는 최소한 50대 전후반으로 늙은 사람입니다. 그는 38년이나 질병에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중병으로 인해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변명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 조용히 나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변명을 합니다.

 

그는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7절을 볼까요?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연못에 먼저 내려가서 저는 안됩니다.

 

의욕도 없는 사람입니다. 낫기를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나병환자를 고쳐주실 때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옵소서라는 반응으로 손을 대시면 고쳐주셨고,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나쁜 형편과 처지만 늘어놓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을까요?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고쳐주셔도 되는데 굳이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모르고,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불평으로 가득한 38년 환자, 완전히 무너진 상태여서 뭐라고 구해야 할지 모르고, 기도할 힘도 없는 그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의 태도는 어떤가요? 10절입니다. 유대인의 관심은 환자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들 수 있던 가장 무거운 것은 썩은 무화과 열매 한 개였습니다.

38년 동안 지긋지긋한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안식일니까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유대인은 안식일을 거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안식일은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데도 기쁜 은혜를 받아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일어나야 하는데 못 일어나는 것이 안식일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8년 된 환자를 고친 사람이 예수라고 하니까 유대인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까 나도 일한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은 생명에 관계된 일, 안식을 주시는 일, 구원을 주시는 일인데 자신도 그 일을 하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동등하고 결론적으로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누가복음 6:1~5)

안식일 아마도 오후쯤으로 보인데, 점심을 먹지 못한 제자들이 배가고파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손으로 이삭을 비벼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왜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느냐?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그리고 당신은 왜 방관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에게 따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행동은 보통 날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명기 23:25절에 의하면 배고픈 사람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 손으로 이삭을 따서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경우 제자들의 행동은 그들의 규칙에 따르면 일에 해당됩니다. 제자들이 밀을 자른 것은 추수에 해당되고,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에 해당됩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21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도망하다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에 가서 안식일에 제사장들만이 먹는 진설병을 얻어먹었습니다. ‘너희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다윗도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지 않았느냐? 안식일이라도 배고픈 사람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이렇게 반문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구약을 읽기는 읽어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구약을 안다고 자처하던 그들이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먹겠다는 데, 주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먹겠다는 데 무슨 시비냐? 율법을 성취하는 그이와 함께 하기에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안식일 이야기는 참된 안식을 방해하는 것은 질병인데, 이 환자의 질병의 원인은 죄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38년 환자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아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완치된 환자에게 예수님이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은 다시 죄를 지면 다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되어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참된 안식일은 죄로부터 구원의 날입니다.

 

두 번째 안식일은 참된 안식은 생명을 살리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장 배고파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해석은 안식일을 제정한 주인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두 사건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사람이 저렇게 콱 막힌 행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태도였습니다. 안식일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고, 안식일에는 무슨 일이든지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한 말에 대한 충성심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고로 바래시인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려는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한번 해 보겠다고 해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충성심으로 율법을 세분하여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장로의 유전이라고 불렸습니다. 장로의 유전의 근거로 볼 때 38년 된 환자의 행동, 예수님의 행동, 제자들의 행동은 모두 세칙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가치관, 세계관, 제도를 깨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집단의식에 나오는 분노였습니다. 종교적인 감정은 왜곡된 분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8년 된 혼자가 치유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배고픈 상황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적용)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꾸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주일에 예배에 늦으면 혼내지만 참된 안식을 누리는 방법을 가르쳤나?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참된 안식의 정신인 생명, 구속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혹시 바리새인들처럼 규칙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 안식은 생명과 관계되었는데 우리는 살리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생각하면서 자칫 우리들도 바리새인과 같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리고 규칙만을 강조하고, 굳어지면 누구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2. 안식일은 생명과 사랑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을 비롯한 율법에 관한 규칙을 제정한 역사가 깊습니다. 구약의 에스라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들은 안식일법을 비롯하여 율법을 거룩히 지키기 위한 각종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39개의 율법을 정리하여 그에 따른 수백 가지의 행동세칙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세칙에 예를 들어 ‘1키로짜리 물건을 들고 99보까지 걸어가면 일이 아니어서 괜찮고, 100보 걸으면 일이라 안된다. 그러면 안식일에 일한 경우가 되어 안식일을 어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세하게 규정해 놓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사람이 걷는 다면 얼마만큼 걸어야 하는 것도 정했습니다. 1,200M입니다. 더 이상 걸으면 일이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불을 켜는 것은 일이 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개방유대인은 안식일에 차는 타고 회당에 가지만 극보수적인 유대인은 아빠와 아들 두발짝 뒤에 엄마와 딸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고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없이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율법에 따라 금식을 하고, 구제를 하고,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칙에 얽매인 그들에게 참된 안식이 있었을까요? 원칙을 어기면 벌을 받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제가 요즘 읽은 책인데요, ‘성도 여러분 안녕들하십니까평범한 성도가 쓴 책입니다. 설교하는 중에 생각이 나서 적어왔습니다. 소제목으로 교회 일이 바빠서 주님의 일은...’

박 씨는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나 다름없는 초신자였다. 그래도 가능한 한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엇가 얻는 것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봉사를 하지 않으면 신앙이 자라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뭔가 교회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가까운 친구가 성가대에 서면 어떠냐고 권유했다. 늦잠을 포기해야 했지만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예배 순서에 직접 참여한다는 느낌이 좋았고, 성가대 사람들과 친해졌다. 얼마 후에는 목요 구역예배에 초청을 받아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덕분에 술자리를 피할 수 있는 핑계가 생겼고,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다음 들어온 제의는 남전도회 회계자리였다. 박 씨는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되어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그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말에 승낙하고 말았다. 막상 해보니 어려운 일은 없었지만 대신 전도회의 모든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교회의 주변만 맴돌던 박 씨는 이제 다른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모임에 꼭 오라고 조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모든 부서 임원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특별새벽기도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새벽기도도 일주일간 하게 되었다. 교회에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박 씨는 신앙이 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의 그 순수한 기쁨을 잃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도 없지 않았다. 교회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오면 피곤이 온 몸을 덮어 자녀들에게 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날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교회일이 겹쳐 만날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몇 주 후에 있을 전도대회가 생각이나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박 씨라는 분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요? 처음엔 선한 의도로 시작했습니다. 갈수록 가중되면서 안식의 기쁨, 봉사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박 씨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하나님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정신을. 기쁨을 점점 잃어버렸습니다. 외형적인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점점 메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하게 살겠다고 할 때, 어떤 규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러한 것을 지키는 것으로 무엇을 이룬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사건에서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행동은 정죄뿐이었습니다. 38년 환자의 안타까움도, 완치된 기쁨도, 제자들의 배고픔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 그들이 정해 놓은 세칙에 따라 사람의 옳고 그름만 판단했을 뿐입니다.

 

마치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은 신앙의 좋고 나쁨을 개벽기도 출석여부로 판단합니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기도시간으로, 봉사를 많이 하시는 분은 봉사로, 헌금으로 각각 자기가 세운 원칙으로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안식일을 주신 원리=하나님이 법을 내신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근거되는 말씀입니다.

2:1~3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든 인간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하기위한 것, 안식하고 샬롬하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1 창조주를 기억하라(창조하시고 또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새창조의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하는 날을 기억하라)

 

신명기 6: 12 구원주를 기억하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복을 베풀어 주신 은총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 감격을 맛보게 하려고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 예배드리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더 나아가 그 감격으로 사람이 사람답데,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가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입니다. 죄는 안식을 방해합니다. 안식일은 회복과 재창조에 주어진 것입니다.

 

십계명의 10가지의 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으로 10가지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계명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동기입니다.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자발적 사랑입니다. 법을 어기면 무서워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원리),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대접하라(원리) 성경은 무수히 많은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원리를 저버렸다는 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허울뿐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모양새를 내는 데에만 관심 있고, 율법의 정신은 저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담고 있는 본질을 주목하면서, 생명에 관심이 있었고,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리새인들은 전혀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안식일법에 매몰되어서 본질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데는 열심이 특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종교적 열심히 부족해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지만, 그 종교적인 열심히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그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그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하려 하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의무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안식일 날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생명을 시들게 하고 얽매이게 하고, 억누르고,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적용) 안식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안식을 빼앗긴 것은 없습니까? 주일에 열심히 하는데 주님이 빠지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주일은 안식의 날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날입니까? 모여서 싸우고 죽이는 날입니까? 원리를 잃어버리고 원칙만이 강조되면 우리도 사람을 죽이는 바리새인들이 됩니다.

 

3. 참된 안식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관계입니다.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과거 가정은 의식주를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현재는 밖에서 다 됩니다. 가정에서 진정한 안식은 친밀한 교제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주일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날입니다. 참된 안식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관계회복 없이 자신이 정한 규칙만 지킨다고 해서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할 도리만 한다고 해서 안식이 누리지게 되는 것은 아입니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먼저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의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마치 컵은 훌륭하게 기능할 때 만든 사람이 영광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에 충실한 것으로 신앙생활 다 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위를 통해 삶이 세상과는 구별되고, 거룩하게 달라져서 생명을 건강케 하고 풍성케 하는데 기여해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무게중심이 가 있어야 합니다. 인격과 삶에 생명의 향기가 진동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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