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묻다(3)

by ysong 2020. 9. 7.

예수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깨닫지 못한 니고데모가 한 9절의 질문은 자신이 받은 충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새로운 이론입니까? 저는 한번도 듣지 못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비밀=구원의 방법은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에 의해 완전히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실천해 왔고 가르쳐 왔던 내용들은 무엇이 되는가? 휴지통에 버려져야 하는가? 자신의 존재의 근간을 기초부터 뒤흔들어 놓은 그런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10~15절입니다. 거듭남의 가르침은 새로운 이론도 아니고 내가 지어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가르침은 구약을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라면 당연히 이해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땅의 일은 구약의 사건들입니다. 만나는 땅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은 믿기는커녕 불평만 했습니다. 놋 뱀 사건도 땅의 일입니다.

 

14절의 놋 뱀은 산 것이 아닌 죽음을 주목했을 때, 죽음에서 회복되는 생명이 왔습니다. 하늘의 일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 참된 생명을 줍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충격이 컷을 겁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켰고, 그것이 자랑거리이고, 존재가치로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거는 그것이 다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면 자신의 자랑이 무너집니다. 자신의 과거의 노력과 인생의 경력이 맨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적용) 말씀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몇십년 동안 자신이 해 온 일, 자신이 추구해 온 일, 자신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던 일이 무가치한 일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은 존재 기반을 흔드는 사건입니다. 자기중심에서 주님중심으로 주권이 바뀝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니고데모는 이후 변했습니다. 주님이 체포하려는 대제사장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행동에서 너도 그 사람의 당이냐고 말을 들을 정도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향품을 가지고 나아와 아리마대의 요셉과 함께 주님의 시신을 장사지내 드림을 변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적을 꺼려서 밤에 찾아왔던 당초 모습과 달랐습니다. 거듭남으로 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었습니다.

 

거듭남 사람의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킵니다. 바울은 다메석에서 거듭난 이후 복음을 위해 받아야 할 고난과 핍박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17,000KM, 70개 도시를 걸어서 배를 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은 매순간 예수님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의 표적을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요즘 무엇을 질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든 질문이 육의 일입니까? 하나님 나라, 거듭남, 예수의 사람.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질문의 내용이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이며, 그 사람을 규정짓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본질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우리들도 본질에 대한 질문하면 어떨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