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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by ysong 2022. 7. 2.

마태복음 4: 18~22절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짧디 짧은 공생애의 발자취를 따라가 가고 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짧은 공생애를 통해 자신이 죄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알리시기 위해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순회전도를 통해 전도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첫 번째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예수님이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여 갈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나에 방문을 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찾아온 왕의 신하를 만났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그 이후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 예수님을 벼랑 끝에 끌고 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난주 예수님에 소문에 대한 엇갈린 반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나사렛에 모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인 왕의 신하는 병든 아들을 고침을 받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 가버나움에서 자리를 잡으심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이후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가버나움은 10개월여 전에 자리를 잡은 곳입니다. 언제였죠?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를 끝내고 어머니와 형제, 제자들과 가버나움에서 선교센터를 마련했습니다.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 첫 번째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10개월만에 가버나움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신 사실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4:13~16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4:31~32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마태는 예수님이 이방의 갈릴리인 가버나움에서 사신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한 것으로, 흑암에 있는 이방의 갈릴리 인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생명의 빛을 비춰주신다는 예언의 성취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가르침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가버나움은 어느 도시이죠?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세관이 있었고, 왕의 신하의 집이 있었습니다.(9:9, 4:46) 아직도 아주 거대한 건물터의 흔적이 있고, 아주 정교한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쪽의 중심도시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가버나움을 선교센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다니시면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하루일과(4:31~44)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어떤 하루일과를 보내셨을까요? 4:31~44절의 말씀을 보면,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시는 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전에는 회당으로 가셔서 회중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오후에는 병든 가정으로 발을 옮겨서 환자를 고쳐주시고, 또 저녁에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찾아온 병자들을 일일이 정성스럽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거기서 떠나서 다른 동네로 가셔서 똑같은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일과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시간은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주님의 일상을 생각하시면서 알차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3. 오늘 본문은 가버나움에 전도하시던 어느날, 전임사역자로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4:18~22).

자기 주위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랍비들의 오래된 관습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신성한 의무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네 명의 제자를 다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이번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를 제외한 3(시몬, 요한 안드레)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40일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나타나신 세례요한의 사역 장소인 요단 동편에서 만났습니다.

 

특히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따랐는데, 세례 요한이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메시아라고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만나 메시아라고 고백을 했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찾아갔습니다. 메시아를 따라다니면 훗날 메시아가 나라를 일으키고, 큰 영광으로 권세를 나타내실 때 자기들도 권세를 나누어 가지고, 사람들을 통치하는 영광을 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가나의 혼인잔치, 예루살렘 방문, 사마리아여인, 나사렛까지 따라 다녔습니다. 그 중에 요한은 예수님을 더 늦게까지 가까이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사건과 이야기를 후일에 요한복음에 기록했습니다. 나사렛 고향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에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찾아갔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니까,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일과는 똑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기치를 들고 전쟁을 일으킨다든지, 어떤 기적을 나타내서 로마 제국을 전복한다든지, 유대인 중심의 이상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복을 받아 잘되고, 잘 풀려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신앙생활과 점점 멀어집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비친 예수님은 개인적인 질병을 치유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것을 보면서 실망을 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옛날 선지자들도 한 것으로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아픈 사람을 고처 주는 일은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완전히 따르지 않고, 일이 있으면 따르면서 예수님께로부터 그들이 생각했던 일이 생길 때까지 관망을 하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무조건 쫓아다니기보다는 자기들의 일을 하면서 때때로 말씀이나 듣고 수양을 하는 정도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본업인 어부라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늘 마음속으로 존경의 마음을 품고 생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만남과 관망이 적어도 10개월 정도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 큰 사명을 불어넣으시려고 다시 부르셨습니다. 주저하고 있는, 오해하고 있는, 그들을 전임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모든 직업의 포기하고, 세상적인 연결을 끊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고기잡이나 하면서 짬을 내서 의논이나 하는 정도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정신적인 위로나, 이론적인 것을 추구하는 정도로 네 할 일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몇 개월만에 12명의 제자를 부르심을 마쳤습니다. 누가복음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부족한 것이 많은 어부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1)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핵심그룹이 됩니다. 그들의 직업은 어부입니다. 어부는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그랬습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체포하여 산헤드린공회에 세웠는데, 그곳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종교지도자들은 사도행전 4:13절에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라고 한 것처럼 학문 없는 범인=무식한 사람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갈릴리 촌 동네의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했을까요? 예루살렘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이거나, 가말리엘학파에 유능한 젊은 바리새인들 중에서 찾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잘 준비된 사람, 가능성이 있는 사람 아닙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분이기에 갈릴리 촌에서 어부로 종사하는 무식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는 방법은 독특하고 다양합니다. 다 알 수는 없지만 모세나 다윗을 보면 어떻게 하시는지 보입니다. 모세는 살인자이고 도망자이었지만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다윗은 부모와 형제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시골 목동이었는데, 위대한 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고난과 역경이라는 인생 훈련을 통해 다듬으신 후에 주님의 때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훈련시키기 어려운 어부들을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물고기나 잡는 비린내 나는 손을 사람을 치유하는 손으로 바꾸셨습니다. 거친 말을 일상적인 용어로 사용하던 그들의 입술을 생명의 말씀이 나오는 입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본문과 마가복음(1:16~20), 누가복음(5:1~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 앞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훈련시켜 결국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간 동안 너희를 전문적으로 훈련을 시키겠다. 너희의 생업, 직업이 되도록 훈련을 시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버려두고 따르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22, 1:20)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을 보면 이들의 대단한 결단과 헌신에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묵상하게 된 것은 본문에 등장한 4명의 제자들은 정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을까?이었습니다. 이들이 이후에 보여준 행적의 전체를 보면서 당시 이들이 버려두고 따랐다는 것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 주장, 메시아에 대한 생각들을 완전히 버려두고 따랐을까? 아무튼 그들은 어부의 생업은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자의 생업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욕망과 욕심은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형식과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마음속에 있는 탐심은 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은 묵상을 한 내용입니다. “나는 목사가 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버렸지, 자존심, 욕심, 욕망, 주장을 버렸나이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부목사로, 교회를 개착하면서 성공하려는 것은 아닌가? 성공한 목사가 되어 예수님을 이용하여 편안한 인생, 안락한 인생을 추구하지는 않았나,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탐심이 없나?”이었습니다.

 

저를 볼 때 목사가 처음 되었을 때, 마음속에 있는 탐심, 성공하고 싶은 욕망, 높은 데를 추구하는 이기심, 시기심 등등 욕망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같은 것을 버리지 못하니까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도록 자꾸 상황을 만드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버려두고 따르는 과정이 자발적이기보다는 예수님의 강권적인 능력, 은혜이지만 타의적이었습니다.

 

제가 버려두고 따르지 못하더라도 완전히 버려두고 따르도록 훈련시키시는 주님을 조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주 내내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저를 세워서 남양주성실교회에 보내신 주님이 얼마나 걱정을 할까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직업을 바꿔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가치관, 인생의 목적, 자녀교육, 판단의 기준, 욕망을 버려두셨나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우리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4명의 제자들의 상태가 아닐까요? 겉으로 버려두고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자기 생각들로 가득한 상태는 아닐까요? 하지만 실망하지 안하셔도 됩니다. 앞으로 우리들을 훈련시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은 4명의 제자를 부르는 내용을 베드로의 중심으로 길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5:1~11)

그 때가 대략 오전 9~10시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아침에 그물을 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배를 타고 나가고, 무리들은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4절에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왭니까?

 

1) 베드로의 상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첫째로 고기 잡은 일로 치자면 시몬이 예수님보다 훨씬 더 전문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몬은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물고기 잡은 일에는 시몬이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래 목수였습니다. 고기를 잡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시간의 문제였습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고기들은 아침이 되면 물 속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게다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피곤이 몰려오고 짜증의 상태입니다.

 

셋째로 장소의 문제였습니다. 물고기들은 먹을 것이 많은 얕은 물가에 서식했습니다. 배도 그물도 얕은 물가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물에 가서 그물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기는 고사하고 생명까지 위험해 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시몬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물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 명령에 시몬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5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해서선생님!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기쁨의 순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해 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해 보는 것입니다.

 

시몬이 지금 전문가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몰려드는 육신의 피로도 물리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도 꾹 억누르고, 기분도 좋지 않았고 짜증도 나고 피곤도 하고 쉬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다스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또 자신의 경험까지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6, 7절에 보듯이 배가 거의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만선이 된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체험을 경험하고 시몬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부의 관심과 목적은 만선입니다. 만선이 되었으면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전혀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죄를 깨달았다는 것보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굴복하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졌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처음 만난 이후 예수님을 옛 선지자 중에 한 분으로 봤던 것을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 봤습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니까 시몬이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합니다. 직업이 뭐냐? 직위가 어떠냐? 학벌이 어떻고 재산이 얼마나 되고 이런 것들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무언가 타는 목마름으로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는 순종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 버려두고 따르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제자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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