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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예수소문에 엇갈린 결과

by ysong 2022. 6. 25.

누가복음 4:14~15절

예루살렘을 떠난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는 여정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을 허무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지난주 설교를 하고 나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경계선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경계선을 허문다는 것이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요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요나는 민족의 경계선을 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웠습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이방인의 경계선을 넘는데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안디옥교회를 방문한 베드로가 이방인인 안디옥교회 교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 오니까 식사를 함께 안한척하기 위해 자리를 피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사회에도 경계선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대의 경계선, 청년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따른 경계선, 강남과 강북의 경계선, 계층의 경계선, 부서, 낯가림, 덕대, 우리교회,,참 많은 경계선을 갖고 살아갑니다. 목사들도 경계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경계선은 예수님처럼 의도적인 실천을 해야 깰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처럼 참된 진리를 깨달을 때, 은혜를 받았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경계선을 허무시고, 사마리아에서 이틀 동안 유하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사마리아를 떠난 예수님은 북쪽으로 올라가시면서 전에 방문했던 가나를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에 도착하기 전에 8,9개월 동안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표적과 이적, 성전청소에 대한 소문이 가나를 비롯하여 갈릴리 전역에 퍼졌습니다. 본문 14절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소문의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 4:47절에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것을 본 사람들이 소문을 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문은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반신반의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찾아온 왕의 신하의 이야기와(요한복음 4:46~54) 예수님은 가나를 떠나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여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이야기가(누가복음 4:16~30)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행하신 소문에 대한 반응입니다. 동일한 소문에 대한 두 반응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습니다.

 

1. 첫 번째 반응은 말씀을 믿고 구원에 이른 왕의 신하 이야기입니다.(요한복음 4:46~54)

 

갈릴리로 올라가는 노중에 있는 가나에 다시 방문하셨습니다. 가나는 처음 표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동네입니다. 예수님이 가나에 임하셨다는 소문이 나기 무섭게, 34km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나까지 찾아왔습니다.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체면불구하고, 자기 집으로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 신하는 주님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4:4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입니다. “당신은 저급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병이 걸려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을 문전박대한 것과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왕의 신하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식의 병만 낫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무속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정치인이나, 인기의 절정에 있는 연예인들이 소문난 무속인을 찾아가서 점을 친다고 합니다. 무속신앙의 요체는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이나 능력으로 신을 달래고 얼러 자신에게 미칠 액운을 면하거나 자기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이 무속신앙의 목적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신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거듭나거나 변되려는 데에 그 요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자기 삶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기독교신앙의 목적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무속신앙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이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질책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오실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이런 왕의 태도에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응대하셨습니다. 왕의 신하가 주님의 이 말씀을 믿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길을 가는 도중 하인을 만나 아들이 멀쩡하게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따져 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을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왕의 신하의 변화는 53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온 식구가 주님의 사랑과 거룩하신 영광과 능력을 맛본 후에 다 같이 예수님을 믿고,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누가복은 8:3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에서 헤롯의 청지기 구사는 바로 가버나움에서 찾아온 왕의 신하로 봅니다. 그와 아내 요안나는 예수님을 좇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왕의 신하와 같은 기적과 표적을 경험합니다. 질병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람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매달려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주시어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무속신앙과 기독교신앙의 갈림길입니다.

이후 자신의 믿음과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는 예수님을 능력만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신의 능력만을 이용하여 액운을 물리치려는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변화될 의사가 추호도 없으면서 단지 주님을 변화시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 했던 왕의 신하의 처음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험이후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좇는 일생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간을 초월하여 고칠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을 때 믿는 참된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 소문에 대한 이방인 왕의 신하의 반응은 표적으로 출발하여-예수님의 책망-겸손, 믿음으로 반응-자식을 고침-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2. 믿어야 하는 동네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

그 후 주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그가 자라신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똑같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말씀을 들었지만 배척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4:16~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에서 서남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나사렛에 올라가셨습니다. 나사렛에 이르자 16절에 늘 하시던 대로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의 전통과 질서를 깨뜨리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셔서 청중들과 함께 앉으셔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셨습니다.

 

회당제도는 바벨론 포로 이후 생겼습니다. 포로이후 동물제사를 자유롭게 드릴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 율법을 낭독하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했습니다. 회당에서는 율법을 중심으로 낭독, 유연하고 자유로운 토론, 기도, 구제로 성전의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도했으며, 회당에서 율법을 교육했습니다. 지금의 예배의 형식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방문하여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61:1~2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메시아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고, 마음 상한 자에게 위로를 주시며, 구속돼 있는 자에게 참된 해방을 주시고, 캄캄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사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려고 오십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그러면 그것이 언제냐?는 기대감에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때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시기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하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가 지금 그이를 보고 있지 않느냐?” “오늘날 이 글에 있는 대로의 큰 은혜를 주시는 그분, 하나님이 그 은혜를 전해 줄 그분이 오늘날 너희 앞에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회당에 모인 동네사람들은 반응은 22절에 은혜로운 말에 놀랍게 여겼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회당에 모인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이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입장을 정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메사아가 아닌 요셉의 아들이다라는 것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당연히 메시아를 알아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왔지만 가장 가까운 유대인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요셉의 아들로 입장을 정리한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성경의 사건을 들어서 말씀합니다. 엘리야 시대 36개월 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 중에 한 과부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으시고, 오직 이방에 사는, 자기 땅이 아닌 시돈 땅에 사렙다에 있는 늙은 과부한테 보냄을 입어서, 그 과부도 살고 엘리야도 공궤를 받아 지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직 수리아의 나아만이 요단 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음을 받은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건방지고, 교만한 그들에게 은혜가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회당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향한다는 생각에 분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책망을 받을 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어쩌고 어째하고 화를 냈습니다. 일어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서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습니다. 낭떠러지까지 갔지만 거기서 그들은 갑자기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엄위 있는 권위를 가지고 태연하게 그들 가운데 지나 가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은혜롭다고 반응을 보였지만 자신에 향해 책망에 분개했습니다. 바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낭떠러지로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유대인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책망에 회개는커녕 거꾸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함을 보여줌으로 이방인의 성공과 엇갈린 결과를 낳았습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말씀에 전해지면 늘 두 반응이 나옵니다. “어찌해야 하나며 가슴을 치면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미쳤습니다. 반면 저 놈을 어떻게 죽일까로 반응합니다. 그들에게 심판이 따랐습니다.

요즘 여러분들은 말씀에 대한 반응이 어떻습니까? 왕의 신하와 같이 믿고 돌아가는 사람입니까? 책망에 반발하는 회당에 모인 동네 사람들입니까?

잘못의 지적을 받으면 잘못했습니다라고 겸손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병명과 회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도리가 아닙니다.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개하고, 불쌍히 여길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기독인의 태도입니다.

3. 예수님이 원하시는 반응의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말씀은,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사명선언문과 같은 말씀은 마태복음 4:17, 마가복음 1:14~15절에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회개하라,,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가르치고, 전도하고, 치유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으로 틀고 들어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도에, 치유에 회개로 반응하라고 하십니다.

 

결론

지금도 예수소문이 퍼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표적을 기대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작은 표적을 통로로 해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하찮은 성경지식과 전통의 틀을 갖고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가끔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질책에 화를 내고, 분개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마다 참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회개의 반응을 원하십니다. 교만하면 할 수 없는 회개의 반응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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