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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기구한 운명의 여인

by ysong 2022. 6. 20.

 

요한복음 4:21~26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 유월절을 맞아(명절),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몇몇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으로 성전청결을 하시고, 8개월가량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특별히 니고데모를 만나,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권능으로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이 강조하신 말씀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구원의 메시지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전청결은 성전의 주인이 누구인지, 니고데모와 대화는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건에 따른 예수님의 가르침을 꼭 기억하여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야 할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이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4:12). 또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요한의 말씀처럼 세례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4:1). 지지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바리새인의 음모가 노골화되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적개심의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정황을 고려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4:3). 갈릴리 가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는 직선도로가 있고, 여리고로 내려가서 요단강을 건너 올라가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는 우회도로가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가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유대 사람들은 절대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영토에 해당되었고, 좌우에 에발산과 그리심산이 있어 경관은 아름답고 땅은 비옥했습니다.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고 세겜에 10년 정도 살면서 우물을 파서 짐승들을 먹인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앙금의 뿌리가 깊습니다. 북이스라엘은 721년 앗수르에 멸망을 당하고, 이주정책과 혼합주의로 섞이게 되었습니다. 왕하 17:24~41는 사마리아 사람의 기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유대도 586년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느헤미야와 에스라에 의해 엄격히 분리되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에스라와 느헤미아에 맞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모리아산으로 알고 있으며, 이곳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의 중심지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전은 마카비혁명에 의해 들어선 하스모니아왕조에 의해 허물어짐으로 적대감이 더 높아졌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를 일이 없는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북쪽 갈릴리로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행로였습니다. 4, 9절에 이같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깊은 지역감정의 골이 패어 있어, 서로 상종치 않고, 유대인은 사마리아 지역에 아예 발을 들여 놓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길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을 허무시기를 원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편협성을 깨뜨리시기 원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용) 우리는 이런 경계선은 없습니까? 성향, 취미, 말투에 따라 만든 경계선을 없습니까? 지역의 경계선을 가지고 않습니까? 인종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의도를 가지고 경계선을 허무는 노력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사마리아여인과의 만남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가는 노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6,7절에 하루종일 걸으신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지쳤습니다. 예수님이 앉아 있는 야곱의 우물은 남쪽, 세겜, 수가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갈래 길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식사거리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 중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도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여인을 만납니다.

 

1. 절망에 사로잡힌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

3장과 4장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여인은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자,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여자/ 배웠고, 무식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죄가 있고/ 상류층이고, 가난하고 천대 받고/ 예수님의 장점을 알고 찾아왔고, 단순한 여행자로 보았고 무관심했고/ 준엄하고 위엄을 갖추었음, 경박하고 거칠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에게 다가갔습니다. 두 인물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대되는 인물도 없을 정도입니다.

 

니고데모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여인은 혼자였습니다. 그녀는 동네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했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그녀를 외톨이로 만들었습니다. 여인의 순결과 정절을 생명처럼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은 이 여인을 죄인 취급,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조차 꺼렸을 겁니다.

 

그녀가 물을 길으러 온 시간은 여섯시입니다. 저녁을 준비하는 바쁜 시간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오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여인이 찾은 야곱의 우물은 인적이 뜸했습니다. 마을과 떨어져 있고, 수가성에는 마을 동쪽에 위치하여 마을과 가까운 또 다른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보통 여인들이 이용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66을 더해서 낮 12시로 해석하여, 처참한 여인의 운명을 설교하는 내용을 들었을 겁니다. 12시로 해석할 경우 19:14절에 빌라도 예수님을 재판한 시간이 새벽 6시로 기록되어 있어, 동일하게 적용하여 6를 더하면 낮 12시에 재판을 받은 것으로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과 만난 시간은 낮 12시보다는 저녁 때 6시로 보는 것이 좋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한 낮은 생필품을 매매되는 시간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로마시간 적용)

 

물을 달라는 예수님에게 대꾸하는 사마리아여인의 말투는 곱지 않습니다. 3:2절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로, 하나님께로 오신 분으로 칭찬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9절에 어찌하여 유대인이 상존하지 않는데 말을 겁니까?”, 11절에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생수를 얻습니까?”, 12절에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를 보면,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이고, 약간 성격이 있어 보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절망에서 나오는 습관적인 언어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이 물러준 것을 과시하면서 주님과 야곱을 비교하는 여인의 관심은 육체가 마시는 우물물에 묶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신경질적이고 무뢰한 사마리아여인과 계속하여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10절에 하나님의 선물-이 여인을 위해 준비한 선물,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예수님이 누구이시지 알았다면”, 14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는 결코 그 영혼이 갈한 법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 영혼의 갈증을 풀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심을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는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분위기와 달랐습니다. 6~15절까지는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의 대화가 평행선을 걷고 있습니다.

 

적용) 평행선을 걷고 있는 대화를 보면서, 이름도 모르고, 냉소적인 태도,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는 여인에게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엿보였습니다. 이렇게 무관심하고, 경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마리아여인에게도 복음이 전하려는 사랑이 엿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처럼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사마리아여인처럼 외톨이로 천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2. 생존에 찌든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대화의 주제는 남편으로 옮겨갑니다. 16~19절입니다. 그 시작은 남편을 데리고 오리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인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예수님은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은 아니까 여인의 말이 맞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남편의 문제를 이야기 한 것은, 여인의 입장에서 불쾌한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여인에게 다섯 남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모릅니다. 당시 여인에게 있어서 남편은 생존을 위한 선택입니다. 혼자서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혼을 했는지, 죽었는지, 소박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5번이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을 겁니다. 5번이나 반복되는 파경을 맞을 때마다 여인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듯 심히 아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이야기를 한 것은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녀의 반응이 19절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100% 동의, 굴복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여인도 계속 못 알아듣다가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말을 듣고서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주님임을 알아봅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할 때 절대로 주님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불쾌한 현실을 지적하고 치유책을 제시했습니다. 가장 깊은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는 삶의 바른 치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가 예수님 앞에서 다 드러나지 않는 한 참된 헌신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수치를 공개한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고 깨닫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적용) 사마리아여인은 생존의 문제가 전부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5번의 결혼도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그의 생존의 문제는 주님을 만날 때 해결되었습니다. 조용히 찾아오신 주님을 만남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외로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극복됩니다.

 

3. 예배의 기쁨을 잊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된 예배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

대화는 갑자기 예배로 옮겨 갑니다. 20~24절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예배로 나옵니다. 마치 나아만장군이 엘리사에 의해 치료를 받고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20절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배경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후 북왕국의 여로보암이 남쪽으로 향하는 국경을 폐쇄한 뒤,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에 산당을 짓고, 그곳에서만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 한다는 남쪽 사람과 달리 북쪽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에서 드리는 예배만 진짜 예배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릇된 예배의 관습과 전통은 예수님 때까지 이어져오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예배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렸지만 예수님을 만난 지금과 같은 기쁨과 평화, 생명의 희열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누구에게, 어떻게 왜, 예배를 드릴 것인지를 먼저 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1절은 예배의 대상자가 누구신지를 일깨워 줍니다. 북쪽도 남쪽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정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장소에 묶여 있다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심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의 장소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23절에 에 대해 대답을 합니다. 때는 시기입니다. 신약의 시대가 되면 새로운 형식으로 예배를 드릴 때, 예배의 혁신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제물이 없이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서, 반복될 수 없는 영원한 제물이 되어, 예수님이 열어 놓아서, 그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드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열린 예배는 어떤 자세로 드릴 것인가에 24절에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성령께서 진리되신 예수님을 깨닫고 나오도록 하는 참된 예배드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진리되신 예수님 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진리를 떠난 예배, 진리에 의거하지 않는 예배, 진리 안에서 자기부인이 수반되지 않는 예배는 참다운 예배일 수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지속, 강화키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키 위함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힘입기 위함입니다.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키 위함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점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녀의 반응은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7).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에게 상종하지 않는데 말을 거는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9). 자신이 숨기고 있었던 남편의 문제를 맞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예수님을 예언을 하는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19). 선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참된 예배를 일깨워주신 예수님은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25)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3:9절에서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대화의 현장에서 떠났지만 사마리아여인은 대화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식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 반응이 무척 늦었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데 구원을 받고 기뻐 뛰었습니다. 25~26절입니다.

 

까칠한 사라리아여인은 바뀌었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그토록 붙잡았던 물동이를 던지고, 만나기를 꺼렸던 마을로 향했습니다. 28~29절입니다. 감격적인 회복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나타는 동일한 현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동네로 뛰어가는 감격이 있습니까? 이런 변화가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육적인 양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을 바르게 알길 바랍니다. 영적인 양식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할 때 힘이 난다는 의미입니다.

결론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급함이 있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여인은 생존의 문제로 찌든 육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나기를 꺼리는 외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소망도 없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 둘 다 구원이 절실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 많고 아는 것 많은 니고데모도, 전혀 사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뭔가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것이고, 그럴 때 예수님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는데 바빠서 신앙이니 뭐니 그런 것은 사치일 뿐, 당장 배가 고파서 영적으로 배고픔 같은 것은 사치인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다가갑니다.

 

니고데모의 영적인 갈급함도, 사마리아여인의 영적인 갈급함도 모두 동일하게 예수님과 만남이 없었다면 그들에게 있는 불행이 종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똑같이 주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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