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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따라서

예수 앞에 나오면

by ysong 2022. 7. 16.

누가복음 5:12~16

1차 갈릴리 순회전도라고 말하는 사건을 정리하면,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 4명의 제자를 다시 부름-지난주 하루일과로 소개했던 내용인데요, 누가복음 4: 31~37절에 기록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일-열병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일(4:38~41)-저녁때는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오니까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심(8:16)-다른 동네로 옮기시어 복음을 전함(4:43)

 

그리고 오늘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마태를 부른 이야기까지를 갈릴리 1차 순회전도사역이라고 이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1차 순회전도사역 중에서 아주 특별한 두 개의 치유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질병과 마음을 동시에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15: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남양주성실교회 성도님 중에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도 동일하게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 나병환자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야기 12~16) 사람의 편견과 예수님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 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전도를 하시면서 다니셨습니다. 어느날 어느 동네에 결실 때에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온 몸에 나병에 걸렸습니다. 심각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나병환자의 특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12절입니다.

 

먼저 나병환자의 특이한 행동은 예수님 앞에서 절하며(마태복음 8:2) 엎드렸습니다. 그가 엎드린 것은 예수님만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분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깨끗케 하시는 권능자로 확신을 가진 믿음의 고백입니다. 엎드려(절하며)의 의미를 해석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이한 행동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전능자로,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호칭입니다.

 

나병환자는 듣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판 가륫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단 한번도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여라고 부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 번째 특이한 행동은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표현은 초신자가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핵심이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핵심을 이해하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도 가히 파격적입니다. 13절에 나병환자에 손을 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민수기 5:1~4절에 보면 부패로 인한 공동체로 분리되는 질병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 유출병자, 죽은 사람의 시체에 접촉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영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레위기 1344~45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고 했습니다.

 

나병이란?

1) 나병은 저주받은 병으로, 혐오감을 주었습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하며 모두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나병환자 이외의 사람들과 일체 교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병환자로부터 4규빗(2미터) 이상 떨어져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철저히 분리된 사람입니다. 그와 접촉하면 모두 부정하게 됩니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침으로 자신이 부정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들은 동정심도 받지 못했고, 저주의 손가락질만 받았습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나아만장군, 미리암, 웃시아왕인데,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웃시왕은 하나님의 징계로 나병에 걸렸습니다.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진영 밖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회복된 이후 진영 안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나병은 더러운 병입니다. 접촉하면 더러워지는 병입니다. 죄로 더러워진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나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이나 예루살렘뿐 아니라 성벽이 있는 어떤 도시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3) 당시 나병환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질병 자체가 주는 고통도 컸겠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심적 고통이었습니다. 고독이 가장 큰 아픔입니다. 온 몸의 나병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 마을 밖에서 생활해야 했고,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향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며 손가락질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고통보다 더욱 큰 상처이고 아픔이었습니다.

 

손을 대신 예수님-13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졌으면 예수님도 더러워져야 합니다. 부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더러움의 영향력이 예수님에게 미치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의 거룩함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더러운 병, 부정한 병, 속이 더러운 병은 예수님을 통해 깨끗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고립의 해결책은 예수님과 접촉을 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추방만이 능사가 아니라 예수님께 접촉되어야 합니다. 육체적, 도덕적 충족을 이룰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회복해주십니다. 이는 두려움이 없는 사랑의 행동이며,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과 마음까지 치유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말씀만으로도 나병환자를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육체의 치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적용) 예수님과 접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안되는 것을 봅니다. 목사가 되면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면 되는데,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믿고 나오면 되는데 안되는 것을 봅니다.

 

14절에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신 것은 그를 정상적인 사회 속으로 회복시키는 배려입니다. 질병의 치유와 함께 관계의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이젠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고, 이젠 가족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젠 동네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지금도 동일합니다. 지금도 나병환자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관계회복의 역사, 질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 죄 사함의 권세로 치유하시는 예수님( 5:17~26)-사람들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주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5:17절이 예수님이 가르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데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서기관)이 있습니다. 이들이 온 것은 은혜를 받으려고 보다는 책을 잡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바리새인이 되면 이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날 말씀을 가르친 집은 아마도 베드로의 집으로 보이는데 방과 거실, 입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질병의 상태가 쾌 심각한 중병병자가 있습니다. 온 몸에 마비가 와서 침상에 누워 지낼 정도입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친구들의 손을 빌려서라도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 앞에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라는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보여준 태도는 특별합니다. 19절을 볼까요.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그들은 장애물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평평한 2층 지붕에 올라가 기와(대부분 지붕은 염소 털로 짠 지붕이었음)를 벗기고 그리로 내리는데 따르는 수고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돌출행동은 주님께서는 볼 때 말씀을 가르치는 흐름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갑자기 지붕이 뚫리더니 중풍병자가 침상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가르침은 중단되었고, 모인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리는 행위는 예수님과 모인 사람들에 대한 결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를 20절이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고 말씀했습니다.

 

중풍병자도 믿음이 있었겠지만 그를 도와주는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서로 협동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은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협력 가운데 나타납니다.

적용)자동차 바뀌, 하나만 뻥크나도 못갑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예수님께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4명의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낙심하고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에게 이끌어 줄 수 있는 4명의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이후 예수님의 말이 정말 엉뚱합니다. “네 죄를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질병은 죄로 인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어야 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낫기를 바라는 중풍병자에게는 황당한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중풍병은 그대로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렸을 겁니다.

 

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제자장만이 표현하는 말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 제사장이(삼상 1:17) 하신 말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길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빠졌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신성모독죄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화를 낸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이 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도 침상을 들고 나가는 것 어느 하나 쉽지 않습니다.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그 중에 어느 것이 쉬워 보입니까?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쉬어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병 고칠 능력이 없으니까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 사함의 문제는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가 죄 사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어려운 것은 침상을 들고 나가라입니다. 당장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24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 죄 사함의 권세가 침상을 들고 나감으로 눈으로 확인시켰습니다. 이 광경을 본 무리들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중풍병자의 이야기에는 3분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친구들은 믿음을 가지고. 고칠 수 있는 권위가 잇는 분으로 확신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기록하고 율법에 능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절하고 정죄했습니다. 무리들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서기관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의 문제입니다. 모든 질병은 타락으로, 죄로 말미암아 질병이 왔습니다. 예수님만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3. 장애물에 좌절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을 찾는 예수님

첫 번째 나병환자의 이야기나 두 번째 중풍병자의 이야기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까지 장애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면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장애물에도 좌절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믿음의 행동을 했습니다.

 

중병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돌아갈까, 한사람 한사람 양해를 구해서 들어갈까 여러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 중에 선택한 방법이 기상천외한 행동이었습니다. 2층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고 침상째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기까지 장애물들이 지금도 동일합니다. 사회적인 편견, 가치관, 이목, 고집 등등 많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질병이 치유됐습니다.

 

신앙인의 대부분의 질병은 욕심과 탐심을 깨닫도록 하는 하나님의 징계이지만 일반 법칙에 맡겨서 처리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법에 의해서 처리하는 수도 있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받은 후 마음 가운데 빛의 비침을 받아 비로소 마음 가운데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이런 것을 했구나라는 마음의 깨달음 갖고 주님께 가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을 귀신이 들어서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등장한 두 명의 사람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질병으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었음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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