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로 살 수 있었던 세례요한의 영성
어떻게 하면 광야의 소리로 살아 갈 수 있을까? 그것은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6절에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보내셨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평소에 관심이 있어서 준비한 것이 어느 시점에 사용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또 준비시켜구나”를 반복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해야 합니다.
또 8절에 참 빛을 증언하는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19절 이하에서도 세례요한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일말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많은 백성이 따르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진 그룹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세례요한의 신분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21절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보낸 사두개파의 질문입니다. “너는 엘리야가 부활한 존재이냐? 그리스도=메시아냐? 왜냐하면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을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의 사이비종교 교주는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여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칭하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아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후,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도 읽지 않고, 태연히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하나님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23절에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 이사야 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사라집니다. 소리는 형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메시지만 남기고 사라질 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인격도 아니고 소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예수가 전파되는 소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리는 자기 역할만 하면 사라집니다.
저는 자신을 소리라고 소개한 세례요한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성인데, 세례요한은 모든 인기와 심지어 따르는 자신의 제자까지도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는 소리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예수님만 전하는 소리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개척한지 3년도 안되어 앞으로 20여년의 목회를 해야 하지만 소리로서만 살다가 살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때문에 성도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하는 예수님만 높이는 소리로 살다가 사라지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여러분도 “저도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살면 어떨까요? 여러분의 자리에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는 소리로 살아가면 어떨까요? 광야는 주님만 바라보는 현장이고, 그 곳에서 주님만 보이도록 소리로 살아가는 인생을 꿈꾸면 어떨까요?
공야의 소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낮아짐은 필수입니다. 26~27절에서 세례요한은 낮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이 행하는 세례에 대해 질문을 하는데, 자신은 물로 세례(회개의 세례)를 베풀지만 오실 분은 내가 신발 끈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분이라고 높였습니다.
타인의 신발 끈을 매어 주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앞에 몸을 굽혀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주님 앞에서는 그런 자세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아예 엎드렸음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립시다.
세례요한은 주님만 높여드려야 하는 신앙생활에 큰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짧은 인생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 신앙의 선배입니다. 여러분들도 광야의 소리로 살아간 세례요한의 영성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3.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요단 강에서 사역하고 있는 세례요한의 목회 현장에 나타난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회개의 세례인 물세레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던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은 마태복은 3:1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목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받으신 장면을 마태복음 3:16~17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왕은 등극하는 왕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면서 위임을 명령했습니다.
마태복음 3:16~17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로 직위하는 장면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이 일은 성부 성자 성령 3위의 연합으로 이뤄진 위대한 사역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이사야, 말라기)을 성취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했던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흔들림 없는 광야의 소리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결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예비하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만 높여드리고 자신은 소리로 살기를 자처했습니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였지만 신발 끈도 풀 수 없다고 스스로 낮아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신앙과 삶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세례요한과 같은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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