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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나의 부활신앙

by ysong 2021. 4. 5.

고린도전서 15:12~19

예수님의 부활을 전후로 해서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기 이전에 제자들은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간 제자도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며 배신을 했습니다.

골방에 숨어 들어가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확 달라지 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매년 반복하는 부활주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2천 년 전에 부활사건이 우리들에게 오늘 이라는 현실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요?

질곡과 같은 현실 속에서 부활사건이 무슨 소망을 주는가요?

이 땅에서 이별하면서 천국에 만나자로만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부활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3절-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14절-전파하는 것도 헛것이 됩니다.

       믿음이 헛되게 됩니다.

15절-거짓증인이 될 것입니다.

17절-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8절-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한 분들이 불쌍하게 될 것입니다.

19절-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불쌍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제일 먼저 생각하고 싶은 것은 부활신앙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은 누구인가요?

소망을 상실한 자, 두려워하는 자, 주눅들어있는 자, 실망한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처음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모욕을 당하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리고 모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로마군인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며 조롱했습니다.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쥐어주며 왕의 코스프레를 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편안할지아다라고 하며 모리를 조아리며 조롱했습니다.

강도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씀이 있는데 저주받은자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흉악범으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꼬면서 조롱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희롱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가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힐난했습니다. 어쭙잖은 성경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 누가 주눅이 들었을까요?

누가 두려워하여 숨고 배신했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새로운 메시야왕국을 꿈꾸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눅 들고 숨은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가치관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수난을 예고하며 부활하신 것을 말씀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주눅 들고 두려워했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시 옛날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골방에 숨은 제자들을 찾아갔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를 찾아갔고, 갈릴리 바닷가에 고기잡이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이들에게 부활신앙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제자들은 바로 오늘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부활신앙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는가요?

예수님은 믿음도 없고, 형편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한 제자들을 마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문을 닫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문을 뚫고 찾아오셨습니다.

편안하리라며 문안의 축복이 임함을 말씀합니다.

아직도 유령으로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친히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를 위해 친히 창에 찔린 옆구리와 못 박혔던 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망한 나머지 고향인 엠마오로 가는 제자를 찾아가셨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풀어서 부활하심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싹터서 본업인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이런 제자들의 상태를 보면서 너희들 너무 하는구나! 나도 실망했다. 너희를 데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냐, 이젠 끝내자, 관계를 끝내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밤새 고기잡이로 지친 그들에게 생선구어 조반을 차려주었습니다. 배신자 도망자 베드로에게 다정하게 다가가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낙심하고, 의심하고, 허비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그대로 용납하며 다시 세우는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부활신앙은 현실로 돌아온 제자들에게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했단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몇 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은 21:4절에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많아지고 까닭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는 빈 그물뿐이었습니다.

수고의 대가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밤새 노력이 헛수고뿐입니다.

 

이들에게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은 회복시켜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생활 속에 부활신앙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끝과 주님의 끝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끝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끝이라고 할 때가 끝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시작을 하시는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을 아는 것으로, 기적을 본 것으로 멈추면 안됩니다.

부활을 선물을 사용하는 자는 어떤 삶을 살까요? 여러 가지만 있지만 오늘은 고전 15:31~32절의 말씀으로 각자 적용했으면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날마다 죽는 겁니다. 그러면 날마다 죽어야 날마다 살게 됩니다.

옛사람이 죽는 일은 매일매일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옛사람은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감격을 누려야 합니다.

 

제가 잘 변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죽지 못했습니다. 내가 누구인데, 내가 과거 이런 사람이었는데, 우쭐거림, 거들먹거림, 어깨에 힘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옛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옛사람이 죽었습니까? 밀알의 죽음은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밀알의 죽음은 전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확증해 주는가? 부활입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무엇으로 자유하게 됩니까? 부활입니다. 눌림에서 자유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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