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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주눅 든 베드로의 부활신앙

by ysong 2024. 4. 2.

요한복음 21:1~14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죽음을 상징하는 좌절, 절망, 염려를 기쁨으로 바꿉니다.

부활의 능력은 소망을 믿음으로 단단히 붙잡아줍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해 살아 있고,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고 죄의 영향력은 죽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좋았는데 이젠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옛것은 의미가 없어졌고,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젠 세상의 술자리에 안가요.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재미가 없어 안 갑니다.

이런 세상 것들이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반응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응합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억지로 하거나 보이기 위해서 하면 율법주의입니다.

기쁘고, 감사해서 반찬을 하고, 기쁘고, 감사해서 설거지하고, 기쁘고, 감사해서 꽃을 삽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는 부활에 대해 살아 있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이 그냥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처음 목격한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3차례 이상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내려갔고,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내려갔습니다.

 

특히 베드로를 비롯한 6명의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해 살았고, 부활에 대해 죽었습니다.

제자의 자리를 떠나 옛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21:1절에 그 후에있었던 일입니다.

그 후는 20장의 예수님의 부활 이후입니다.

 

그 후 베드로의 반응이 3절입니다.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입니다.

옛날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명단이 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7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부를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부활에 살아 있어요, 죽어 있어요.

숨은 쉬고 있지만 부활의 주님에 반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응하지 못한 베드로, 죽어 있던 베드로에 찾아온 것입니다.

자신의 부활이 제자들의 능력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에 반응하도록 하신 회복의 과정이 눈물겹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제자로 부른 그곳에서 다시 만납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로 부를 때처럼 그들은 빈

그물이었습니다.

밤새워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처음 만남의 상황을 재현합니다.

베드로가 과거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영적으로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죽으면 이런 영적인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빈 그물입니다.

수고의 대가를 거두지 못합니다.

밤새 노력이 헛수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죽었던 옛날의 낭비한 삶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에베소교회에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던 것처럼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여 회개하여 부활에 반응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음으로 이용한 것은 숯불입니다.

9절은 숯불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3번 부인했습니다.

배신하지 않겠다고 칼을 뽑았던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3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숯불이지만 숯불을 켜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숯불 앞에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묻습니다.

 

인간적인 열심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다 무너져 내려야 부활에 살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의 자존심, 열심에 대해 죽어야 은혜로 사는 부활에 살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옛것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숯불을 켜 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조반을 차려주심(10, 12)=육체의 회복입니다.

왜 그렇니?

왜 여기에 있니?

묻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해 줍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제자들의 변화는 주님이신 줄 알다”(12)로 표현됩니다.

 

베드로가 부활에 살아나게 하신 약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람과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명약은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너 나 사랑하지, 그것만 확실하면 내 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여 다시 사명과 성령을 받으니까, 세상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부활을 근거로 해서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스스로 묻습니다.

죄에 죽었니?

부활에 살았니?

어떻게 부활에 살았니?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부활신앙은 회복시켜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적용)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끝과 주님의 끝은 다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끝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끝이라고 할 때가 끝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시작을 하시는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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