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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완성)

이면의 정신

by ysong 2021. 1. 31.

마태복음 5:17~26

우리는 그동안 산상수훈의 서론을 다뤘습니다.

이젠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본론에서 처음 제기되는 이슈는 율법입니다.

 

8복을 가진 제자를 압축하면 소금과 빛의 제자입니다.

이 제자가 어떻게 율법을 적용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최초의 기독교인인 유대인이 율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17~20절은 총론이고요, 21~48절은 각론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율법을 해석함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6가지 율법의 해석하고 있습니다. 21-분노, 27-음욕과 간음, 31-이혼, 33-맹세, 38-보복, 43-원수사랑에 대한 해석인데 근본정신을 내세워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오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몇 번이나 유대인들이 율법이라고 규정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손 씻는 규례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안식인일 병 고치는 것을 금했는데도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제자들도 안식일 날 밀을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의 바른 정신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많이 말씀을 알고 가르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얼마나 무거운 종교의 짐이 되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했을까요.

 

오늘날도 수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잘못된 성경 해석과 가르침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이 된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인들 중에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이기 덜 중요하고, 신약의 바울서신은 권위가 없고, 오직 4복음서 중에 예수님의 말씀만 중요하다고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는 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로의 유전이 아닌 성경을 바르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말씀이 17절입니다.

17-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총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폐지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망가트리려고 온 집단으로 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후에 율법에 대한 재해석은 율법을 망가트리는 것이 아니라 본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내려고 하신 참된 의미와 원칙은 무엇인가요?

시내산 언약의 내용이 특별히 출애굽기 19장에서 민수기 10장까지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구약 성경의 율법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율법을 어떻게 지켰는지가 역사서이고, 이러한 율법을 매일 삶 속에서 어떻게 지켜 가야 하는지가가 시가서이고, 이러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가 예언서입니다. 구약 성경의 핵심은 바로 율법에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본질이여 기반인 십계명을 보면 전체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경과 경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 하나님의 날에 대한 경외, 부모에 대한 존경, 생명에 대한 존경, 소유물에 대한 존경입니다. 십계명의 기본 원칙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과 우리 자신에 대한 존경입니다.

이러한 경외와 존경은 수많은 사소한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고수하는 데 잇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 있다, 사람의 행동을 금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생활을 정돈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본심을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폐지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유대 율법학자들의 율법이었습니다.

후세 유대인들은 십계명과 레위기(제사법, 시민법 위생법)의 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에 대해 해석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해석들이 구전되어 오다가 성문화했습니다.

이것을 미슈나라고 불렀습니다.

이 미슈나를 해석하기 위한 주석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탈무드입니다.

 

성경은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모든 일을 노동으로 정의했습니다.

짐을 운반하는 것도 노동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다음에 짐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살고 선교사님은 안식일에 가장 바쁘다고 합니다.

안식일 날 옆집 유대인 아주머니가 자기의 집 앞에서 서 있다고 합니다.

초인종을 누리지 않고 서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이 집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집안에 들어가면 냉장고를 처다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냉장고에 코드가 빠졌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코드를 꽂아준다는 겁니다. 왜 말을 하지 않을까요? 말을 하면 일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자부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아닌 율법을 폐기하고 율법의 본질을 가르치기를 원하셨단 것입니다.

 

18-천지가 없어지면 역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고로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꽃을 시들어도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의 일점은 요오드인데요, 우리가 보면 콤마와 같습니다.

일획은 히브리어는 대분자입니다.

아랫부분의 작은 돌출부분입니다.

아래 위의 가로의 획의 크기를 말합니다.

율법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성취도고 완성되고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19-18절을 더 풀어서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기준을 버리는 자와 행하는 자를 크다와 작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지킨다고 했지만 본의까지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주의로 흘러 죄를 범했다 안 범했다고 판단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20-성경을 연구하는 최고위 권위자는 서기관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필사하며 연구했습니다.

성경의 행위를 강조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존경할 만큼 성경의 말씀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동하는 동기가 된 것은 율법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문자적으로 붙들고 있는 의, 외적 행위만 강조하는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에 대한 설명이 6가지 율법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유대인은 사람을 죽인일 없으면 율법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적인 동기까지를 살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21~22-모욕적인 사용된 언어도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화를 내고 모욕적인 언사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분노는 심판을 받고, 욕하는 놈(멍청한 놈, 무가치한 놈)은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은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창조물에 욕을 하면 누구에 대한 불순인가? 하나님에 대한 불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살인의 기준을 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분노가 욕이라는 행동으로 발전하고 살인하게 되어 지옥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고 주신 의도라는 것입니다.

분노와 인격적인 모독이 살인보다 가벼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욕하고 분노했는데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목이 긴급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망을 들을 일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과 화목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화목이 회복되지 않는 예배는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형제가 분노를 품는 상태가 되었다면 즉 원망 들을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적용)

예수님이 십계명에 대한 원 뜻에 따른 바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동기와 외적인 동기가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겉으로는 예의 바른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교만한 사람들을 봤습니다.

겉으로는 말씀을 말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적용하지 않는 분들을 봤습니다.

속과 겉이 통일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의 교훈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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