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열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저도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외적인 성과를 얻기 위한 열정과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내적인 열정이 있습니다.
1) 외적인 열정입니다.
남보다 이상의 열정을 쏟아 부어야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비교적 빨리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감사를 위해 열심히 청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잠을 줄이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전도대회, 선교대회, 비전트립은 모든 열정 쏟아 붓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성과도 나타나고 보람도 느끼게 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교회의 성장과 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과를 거두었고,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아도 돌아가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부유하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외적인 열정을 쏟아 부은 결과입니다.
2) 내적인 열정은 기간이 없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했던 사람이 사랑스러워지지도 않습니다.
별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외적인 열정보다 내적인 열정을 지속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내적인 열정이 미지근해진 것입니다.
내일내일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내 주인의 자리에 주님을 앉게 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행해야 합니다. 이 열심히 잃지 말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치 오늘 이 시대가 만난 교회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풍요한 물질문명과 드높은 과학 문명의 만세 소리와 기름진 문화의 홍수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길 데 없는 교회의 외적 화려함에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의 내적인 영적 상태는 믿음에 가난하고, 벌거벗은 수치요, 소경 같은 캄캄한 현상입니다.
구원의 감격이나 회개의 즐거움이나 천국의 소망이 보이지 아니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외적 부요와 내적 부요는 언제나 정비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교회를 책망하고, 징계하는 인내의 열심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책망과 징계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열심이고, 소망을 촉구하는 회개입니다.
주님의 발은 문 밖에 서 계시고, 주님의 손은 문을 두드리시고, 주님의 음성은 부르시고, 문을 열면 들어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하십니다. 이렇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뜨겁게 강청하고, 생명의 회복을 촉구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소망이 있습니다. 미래가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은 오늘 실상 금을 사서 부요케 하라고, 흰옷을 입으라고,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고 강권하십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인 믿음을, 성화의 첩경인 회개를, 내일의 소망인 천국을 가지고 우리들 교회에 임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 중 제일 마지막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8, 3:6, 13, 22)라고 빠짐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들음은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7대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왜 들어야 합니까?
성령이 교회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 계시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롬 10:17).
그 믿음의 결국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벧전 1:9).
종말 승리에 대한 대비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4:7).
그러므로 들어야 합니다. 확실히 들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깨어 들어야 합니다.
소망하고 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 결과 모든 영전의 격전에서 승리하는 장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 보좌를 보자(2) (0) | 2020.09.29 |
---|---|
하늘 보좌를 보자(1) (0) | 2020.09.29 |
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2) (0) | 2020.09.24 |
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1) (0) | 2020.09.24 |
작은 능력으로도 칭찬 받은 빌라델비아교회(2) (0) | 2020.09.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