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7:39~60절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의 모독죄로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변론과 같은 설교를 길게 합니다.
창세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알고 있습니까?
시기하고 거절한 후손은 당신들이 아닙니까?
거침없이 쏟아내는 설교에 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결론에 해당됩니다.
무슨 내용일까요?
우상숭배의 위험성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우상숭배일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대제사장과 성경의 전문가인 바리새인과 제사를 관장하는 사두개인이 이런 실수로 인해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구약 선지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도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인데 아이러니하게 우상숭배를 가장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8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으로 가득함을 보여줍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지막 권면도 우상숭배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를 당한 결정적인 설교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장 중요한 영적인 싸움은 우상숭배를 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말씀 하신 우상숭배는 내용이 달랐습니다.
우상숭배의 두 가지를 통찰력 있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광야교회 담임목사님이 되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예배였던 것처럼 바르게 예배드리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눈에 보이는 신으로 생각하며 따랐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이끈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찾아오면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가데스바네야에서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비슷합니다.
좋을 때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39절입니다.
백성들은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한 송아지 신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송아지는 평생 애굽에서 봤던 신입니다.
사람들은 봤던 것밖에 모릅니다.
그동안 만나로 먹고 살고 있는데,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를 받고 있는데, 이들의 마음은 애굽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몸은 교회에 있는데, 마음은 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마음은 세상을 향하여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이 부러워서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붙잡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다면 아직 마음이 애굽을 향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이기에 어려운 영적인 싸움입니다.
보이는 신을 추구하는 신앙의 결과는 40~41절입니다.
우리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던 모세입니다.
자기를 넘지 못한 신앙입니다.
자기를 향하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우상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듭니다.
43절을 보면 다른 우상도 섬겼습니다.
광야는 은혜의 시간인데, 돌을 던지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거절-애굽으로 향하고-우상을 만드는 패턴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말씀을 거절하고, 세상을 향하면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을 만든 결과는 42절입니다.
참된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화가 났습니다.
마음 있는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무서운 심판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버려두는 겁니다.
마음이 떠나면 무관심한 겁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미움조차 없어진 것입니다.
40년간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느냐?
자신을 섬긴 것이냐 나를 섬긴 것이냐?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있느냐?
이 진문에 옳은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애굽-광야교회-가나안-바벨론으로 옮김을 당합니다.
우상숭배가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애굽을 빼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평생 광야교회에서 애굽을 빼내는 훈련을 받습니다.
애굽을 향한 마음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거짓된 경건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소중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거짓된 경건으로 우상숭배 한 곳이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증거의 장막인 성막과 성전을 구분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설계도를 주시면서 제작하도록 했습니다.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도자로 세워서 완성했습니다.
성막은 크지 않았고 겉으로 보기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했습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이동하기 위해 모든 기구를 들 수 있도록 가볍게 제작했습니다.
지금도 몽골의 게르를 보면 짐이 가볍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인생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성막은 유목민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과도 어울립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지으라고 했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받은 은혜가 많아서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다윗이 자발적으로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화려한 왕궁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초라는 텐트, 장막에 머물고 계신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성전은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는데 실로에 있는 성막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 너는 전쟁을 많이 해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을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은 웅장합니다.
각종 화려한 돌과 백향목, 보석으로 채웠습니다.
이후 히스기아왕이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각종 보화로 가득했습니다.
성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우상으로 채워졌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채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유가 넉넉해지자, 곳간을 더 지으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으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성전을 지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주보다도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봉헌의 기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왕상 9:1~3절입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을 성전에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그 안에 계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필요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 범죄하면 버릴 것이고 모욕거리가 될 것이라고,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은 성전을 자랑했고, 웅장함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착각은 타락의 온상, 교만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성전에 앉아서 거짓 경건으로 자신들을 치장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마치 공정한 재판을 말하지만 실상은 선택적 정의를 행사하는 요즘 법관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거짓된 정의, 거짓된 경건은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우상숭배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들을 향해 당신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1절이 이런 표현을 담은 말씀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백성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할 때 쓴 표현입니다.
거짓된 경건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졌기에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거짓된 경건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졌기에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합니다.
선지자를 박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살인자가 됩니다.
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54절이 반응입니다.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면 회개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7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돌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거짓된 경건에 빠져 우상숭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짓된 경건은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을 속이지 못합니다.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영적인 눈으로 봅니다.
주님이 서신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더 큰 은혜는 주님이 서는 장면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맞이하기 위해 서서 손을 활짝 펼쳤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장면입니다.
저희는 주님을 서게 못 하는 약한 믿음입니다.
은혜 주셔서 주님이 우릴 맞이하기 위해 주님이 설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마지막 우리가 올릴 기도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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