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3~23절
교회는 다름이 같음이 되는 신앙의 여정을 배우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릅니다.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이 로마서 12장~15장까지 대표적인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를 요약하면 분별, 분수, 섬김, 축복, 국가관입니다.
그 단어의 의미와 뜻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다시 확인하고, 또 살아가고 확인해서 얼마나 말씀에 가까이 서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콩나물이 매일 물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세계관, 가치관이 형성되는 겁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앙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14장에서 시작해서 15:13절까지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과 예배드리는 날에 대한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주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랬고, 로마교회도 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인데 잘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14:6절입니다.
주를 위해서가 해결 방법이기도 하고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양편의 사람이 각각 주를 위해서란 판단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먹는 것과 예배드리는 날의 문제가 신앙과 연결되니까 더 심각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총회든 노회에서 활동하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다 주를 위해 한다고 주장합니다.
분쟁이 있는 교회도 앙편으로 나뉘어져 다 주를 위해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갈등하고, 비판하고 업신여깁니다.
생각해 보면, 사소한 문제이고, 기호의 문제인데, 신앙이 결부되니까 대화가 거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양보가 안 됩니다.
사실 종교는 음식의 절제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표현으로, 수행의 과정으로 여깁니다.
불교는 고기를 먹지 않고, 유대인과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힌두교는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지금도 중요한데 그때는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거나 유대교의 정통을 받아들인 이방인은 대부분 신전에 제사를 드리고 시중에 유통된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우상의 제물인 고기를 먹지 않고 안식일과 같은 절기를 지켰습니다.
반면 지식이 풍부해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음식과 절기에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거리낌을 받지 않고 고기를 먹었고, 안식일 다음 주님이 부활한 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는 비울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르침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누가 약한 자이고 누가 강한 자인가요?
보통 참는 자를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반대로 약한 자라고 합니다.
약한 자는 유대 전통에 익숙한 사람이나 믿음 생활을 그렇게 했던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강한 자는 절제보다는 자유를 강조한 이들입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어우러진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동일한 자격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13절에 본질이 아닌 것으로 서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14:14절이 중요합니다.
양편의 사람에게 동시에 준 교훈입니다.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고기는 부정한 것입니다.
음식이 자체로서 부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부정하다고 여기면 부정한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부정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신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고유한 전통의 음식으로 받아들이며 맛있게 먹습니다.
반면 그런 사람들을 혐오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의 감정만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10절의 말씀입니다.
서로 정죄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자신이 절대적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을 강조하다가, 내 기준이 강해서 다투게 됩니다.
친구 목사님의 친척이 교회를 옮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도 할 때 축원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자기 맘에 거슬리게 들려서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로님은 부목사님이 축도를 하면서 손가락을 벌렸다는 이유로 책망을 했다고 합니다.
본질이 아니지만 그것을 갖고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분도 다 심판대 앞에 섭니다.
다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네가 판단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았는데 왜 시비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 주를 위해 한다고 생각한 그 행동이 정말 그러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21~23절입니다.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답습니다.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고 정죄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정말로 믿음에 따라 하는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면 상대방의 신앙을 존중해 주라는 겁니다.
하나님만 절대화이고 모든 것은 상대화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이 한쪽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치 소경이 코끼리의 한쪽을 만지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앎이 풍성해지고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신앙만 돌아보지 말고 그 사람의 신앙도 돌아봐야 합니다.
그도 신앙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진진하게 봐야 합니다.
자꾸 어긋나는 것으로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겁니다.
그 사람도 신앙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주를 위해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과 판단이 지나쳐서, 절대적 기준이 되어 비난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일까요?
17~19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입니다.
또 평화로 나타납니다.
희락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피조물이 제자리에 놓여 서로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힘써야 합니까?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워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교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형제가 혹시라도 걸려 넘어질 만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며 적극적으로 치워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작은 실천 항목들이 있습니다.
4절-첫 번째 실천입니다.
주인이 알라서 합니다.
다 주님이 하십니다.
8절-두 번째 실천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 달린 것입니다.
12절-세 번째 실천입니다.
자기 일을 직고하면 됩니다.
비판이나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남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지 말라는 것입니다.
16절-네 번째 실천입니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고 절기를 지킨다는 잘난 생각, 난 지식이 있어 자유롭다고 한 그 잘난 생각이, 신앙이 욕먹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했어, 난 이만큼 이루었어, 난 이런 은혜를 받았어, 이를 내세우면서 왜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본질에 충실하면 부드럽고, 여유가 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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