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9~20절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평안을 빼앗기지는 않았는지요?
보통 사람들은 참된 평안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분들도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관해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욕심을 내려놓으면 가능하다고 말하기 도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욕심을 내려놓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평안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은둔 생활을 택한 이들도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저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평안을 누리지 못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가끔 평안을 깨기는 하지만 횟수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이는 제가 말씀과 신앙생활을 통해 조금 평안을 깨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죄의 영향력 아래 있기에 평안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평안이 가끔씩 깨진 이유도 동일합니다.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된다면 평안을 누리는 시간이 길어질 겁니다.
평안을 깨는 죄의 실체를 아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1:18절부터 시작된 죄의 유형에 과한 결론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설교는 딱딱하고 어렵습니다.
설교는 성도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설교는 목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해야 하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는 죄의 유형을 3가지로 요약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면서 높은 윤리적인 수준을 으스대며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알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일이 없는 종교인입니다.
인류는 예외 없이 죄의 3가지 유형에 속합니다.
죄인이 하는 3대 사역이 있습니다.
비교, 판단, 정죄입니다.
비교해서 내가 조금 낫다는 것밖에 할 줄 모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9절은 선언합니다.
모두 죄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죄가 사람 위에서 지배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사회가 악으로 가득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이 선언을 거부합니다.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핑계를 댑니다.
주변에 착하고 선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고 노력만 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죄 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잘난 유대인은 이방인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헬라인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지혜로운 철학자를 내세우며 유대인을 무시했습니다.
로마인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며 유대인이 막 대했습니다.
다들 자기 방식대로 으스대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살았습니다.
이것밖에 보여줄게 없음에도 지금도 인류는 위대하다며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죽이고, 죽어가고 있으며 서로를 향해 증오의 칼을 휘두르면서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9절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모두는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인 이상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에베소서 2: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죄 아래 있는 진노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5:12~14절을 보면 인간은 어떤 예외나 해결책 없이 죄의 세력에게 내맡겨졌습니다.
죄는 잘못된 행동이 아닙니다.
각 사람을 다스리는 어두운 힘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는 죄의 실체 아래 있습니다.
의지, 양심, 다짐으로 통제되지 않는 죄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죄는 죄를 짓고 살면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죄가 나의 일부가 되어 죄인지 나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조건만 맞으면 죄를 짓게 됩니다.
습도만 맞으면 곰팡이가 피는 것과 같습니다.
환경을 갖추지 못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9절의 선언은 진정 어떤 자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해당 사항이 없다고 보면 안 된다고 권면합니다.
예수 없는 인생이 얼마나 가련한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기록된 것이며, 오래전에 선포된 것입니다.
바울이 특별하게 깨달아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10~18절은 로마서에서 가장 긴 구약 인용 부분입니다.
바울은 죄의 보편성에 대한 증거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악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바울 앞에 구약성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세오경, 시편,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0절은 의인이라고 주장한 유대인을 대상으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인이라고 생각한 유대인에게 의인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은 화가 많이 났을 겁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율법은 의인을 만들지 못하고 죄를 깨닫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해 달려왔다고 믿었지만 자기 의만 추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1절은 지혜를 깨달았다고 하는 헬라인을 대상으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들의 총명과 지혜는 어두워서 깨닫는 자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깹니다.
죄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도록 관계를 깹니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깹니다.(10~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깨닫고 감사하는 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범한 아담을 찾아왔을 때 아담은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왔을 때, 아담은 잘못했다고 회개하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못할 정도로 죄 아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죄는 말로 사람과의 관계를 깨도록 합니다.(13~14절)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말을 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악독이 가득한 마음의 소리가 입을 통해 나옵니다.
속임과 독으로 가득한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부패한 양심, 감정, 의지가 쏟아져 나옵니다.
세 번째 죄는 이웃을 파멸시키게 합니다.(15~17)
상해를 가해 피를 흘리게 합니다.
이웃 나라가 서로 전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웃과 싸움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파멸을 길을 걸으면서 관계를 맺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지 못합니다.
죄인의 상태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씀이 18절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을 잃은 것입니다.
문제는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19~20절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지켜 이방인과 구별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율법은 정체성의 외적 표지로서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표를 달았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는 사실만 알게 해 줄 뿐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해야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인정해야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이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 아래 벗어나는 길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길을 소개합니다.
적용) 관계 속에서 겪는 문제를 어떻게 인식합니까?
일상의 불안도 배후가 있습니다.
일상의 걱정도 배후가 있습니다.
죄의 영향력입니다.
죄의 열매인 각종 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질병, 가난, 전쟁, 차별과 같은 악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십시오.
나는 죄 아래 살고 있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안정을 누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의 신분입니다.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은 기적이다 (2) | 2024.06.09 |
---|---|
출생 이야기 (0) | 2024.06.02 |
사랑을 잃은 종교생활 (0) | 2024.05.12 |
비판하면 의인이 되나요? (1) | 2024.04.28 |
안 들으면 이렇게 됩니다 (1) | 2024.04.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