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27~4:8절
지난주 우리들의 출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납니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는 첫 번째 출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오는 두 번째 출생입니다.
거듭남의 출생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살기 위한 출생입니다.
첫 번째 출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출생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출생했는지 그 사실을 21~22절에서 요약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잘해주셔요.
일이 잘 풀리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실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굳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꼭 알아야 하는가?
굳이 의롭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알아야 합니다.
놓치면 안되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손만 보면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신앙을 맹신하게 됩니다.
유대인처럼 율법만, 선민사상만 자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신종 바리새인이 됩니다.
로마서를 다시 보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제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법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법을 설명한 내용이 28절이고요. 29~31절은 믿음의 법에는 차별이 없다는 설명이고요, 4:1~8절에서 두 명의 케이스를 들어 믿음의 법을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상대자인 이스라엘은 불신실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 다시 인류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신실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믿음의 법은 철회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출처입니다.
28절은 사람에게 미친 믿음의 법을 말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 사실은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이-으로써의 뜻입니다(부사). 신-믿음이고 / 칭-부르다, 일컫는다/의-옳은 의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자를 한자로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의자는 양양자와 나아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내 위에 양이 있는 형태입니다.
제사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저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28절의 말씀을 3:3절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를 풀어서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가?
아브라함과 다윗이 의인이 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두 분에게 어떻게 하셨고, 두 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알아야 합니다.
3절은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이 의로 여겼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로 여긴 것으로 읽혀집니다.
3절의 말씀은 창세기 15:6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했습니다.
그 이후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내가 너의 방패고, 너의 상급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저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나를 지켜줄 후사인 자식이 없습니다.
신실한 종인 엘리에셀밖에 없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밖으로 끌어내어 하늘의 뭇 별을 보여줍니다.
너의 자손을 이렇게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면서 한 말씀이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무엇을 믿은 것인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한 분의 인격. 존재 자체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확신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근거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겨 졌나요?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고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형편도 안됩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이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법은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가 전제되고 은혜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는 강력한 신뢰가 들어있어서 행위가 동반됩니다.
아브라함이 이뤄질 것 같지 않아도 받아들였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것을 의롭게 여겼습니다.
믿음의 법에는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불 경건한 이방인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선택하시고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4장은 ‘여기다,’ ‘쳐 주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로기조마이’를 11회나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다는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뉘양스입니다.
외국인노동자인데 한국의 어느 대학을 입학하려고 합니다.
한국어 시험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오래 살았고, 한국어가 능숙하고, 인터뷰했는데, 한국어 실력을 갖춘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는 그 학생이 입학할 수 있다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여 입학을 허락했습니다.
원래 한국어 성적이 있어야 하지만, 대학교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쳐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학생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 경건한 이방인입니다.
의롭지 못하고 자격 미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만을 보시고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정해 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의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명실공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실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관계가 정상화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긴 이후에도 계속해서 믿음 훈련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태어나게 합니다.
무에서 유를 일으킨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없는데서 일어나는 것이 창조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해야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8절의 고백까지 훈련시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부활신앙입니다.
창조에서 부활신앙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에 점점 부활신앙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법입니다.
믿음의 법으로 살기 시작한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창 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아멘으로 대답했습니다.
믿음의 법으로 사는 사람은 아멘과 순종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법으로 사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7~8절입니다.
죄를 고백해서 사함을 받는 자가 시편 32:1~2절에 복 있는 사람입니다.
허물, 죄, 마음의 간사함, 정죄는 죄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허물=반역=알면서 범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함, 가려짐, 없고,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의 핵심은 허물을 덮어준 것, 죄를 사해 준거입니다.
하나님은 따지지 않고 고개를 슬쩍 돌려서 다윗과 관계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이 복을 다윗이 잘해서 받았나?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을 근거로 한 믿음의 법으로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법은 회개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적용)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 것입니다.
여겨준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다는 담보를 맡기고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저당 집히고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 이후 부활신앙을 갖게 될 때까지 믿음을 심어 줍니다.
믿음의 법은 회개로 관계를 지속합니다.
구원은 세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세탁하는 겁니다.
회개는 빨래입니다. 예배를 통해 회개하는 겁니다. 회개하는 자가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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