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21~26절
각자 출생의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재밌고, 아찔한 이야기까지 특별히 기억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저도 첫째와 둘째의 기억되는 출산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부모는 출생의 기쁨을 생생하게 자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자녀들은 자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들려준 출생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한 사람이 어떻게 새롭게 출생했는지 이야기해 줍니다.
죄인으로 살고 있는 한 사람이 어떻게 새 생명을 얻게 되었는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생명에 관한 이야기, 출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로마서는 새 생명을 얻는 출생과 성장의 전 과정을 자세히 알려줍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이며, 좋은 소식인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소리가 아니라 인격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16~17절에서 로마서를 말합니다.
주제 안에 5가지 정도의 항목을 담았습니다.
1)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미음에 이르게 됩니다.
2)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3) 차별이 없습니다.
4)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5) 구약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제를 제시하고 죄인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1:18~3: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3가지의 죄인의 유형을 다룹니다.
인간이 죄의 지배하에 들게 된 것은 스스로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율법으로, 각종 종교적 수행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능력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비교, 판단, 정죄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죄인들이 만든 사회는 악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3:21~22절은 1:16~17절의 주제를 다시 반복한 내용입니다.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주제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주제를 부연 서술한 것입니다.
같은 점과 첨부된 부분을 찾아볼까요?
1:16절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으로 추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16절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 표현합니다.
1: 17절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1:17절의 하박국의 말씀의 인용은 율법과 예언자의 증언으로 논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제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반복한 것입니다.
21~22절에 추가된 내용은 율법과 상관 없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제의 각 항목을 예를 들어가면서 논증해 갑니다.
오늘은 주제의 의미와 주제를 더 설명한 내용입니다.
먼저 주제를 반복한 21~22절의 말씀입니다.
21절에 우리 성경에 빠진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입니다.
전혀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다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 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노아, 욥, 요셉, 바울(빌 3:16절)도 의로운 자로 평가합니다.
인간적인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자로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새로운 길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룬 의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다른 길의 또 다른 특징은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싫어한 말입니다.
사람은 차별을 좋아합니다. 나는 너와 달라, 우리는 너희들과 달라를 좋아합니다.
사실 진리는 머리가 좋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그는 선생이고 지도자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3:3~8절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출생 이야기입니다.
출생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있습니다.
23~26절은 21~22절의 문장을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23절은 1:18~3:20절 까지의 내용을 압축했다고 보면 됩니다.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로부터 출생한 한 사람이, 육신을 가진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욕망과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져서 우상숭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다른 주를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성막이 완성되면 성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런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타나나게 되었는가?
어떻게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는가?
24절이 그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속량으로 이뤄졌습니다.
값을 지불 하고,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으로 값을 치르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산고의 고통과 같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데 우리가 지불한 것이 없이 값 없이 의롭게 되었기에 은혜입니다.
25절은 관계 회복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악된 백성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찾아오셔서 눈감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눈 감음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고 다시 만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26절은 그 결과로 우리 모두도 의로운 백성으로 회복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눈 감아 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치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우리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 구원은 예수를 통해서, 속량으로, 간과함으로, 믿음의 법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고, 사람이 만든 분이 아니며, 심판주이기에 살고 죽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새롭게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출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첫걸음일 뿐입니다.
이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법을 익히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아이가 탄생하여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가족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니까 이런 위대한 선언 중에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적용) 은혜는 선물입니다.
살면서 제일 기분 좋았던 순간은 언제였나?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순간은 죄인이 예수 만나 신자되는 순간입니다.
죽었었는데 생명으로, 출생의 기쁨, 다시 태어남, 해방과 자유, 억압에서 자유로, 어둠에서 빛으로, 소경에서 정성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타락으로 파괴되고 뒤틀린, 헝클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입니다.
당신은 죄인이었습니다.
2.지금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3.당신은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성도입니다.
4.연약함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5.당신은 용서의 은혜를 압니다.
6.당신은 은혜를 악용하여 더 많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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