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6~9절
지난주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를 집 안에서 잃었고, 둘째를 집 밖에서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다 사랑합니다.
두 아들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사랑이 많고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부모가 닮아가야 할 모델이기도 합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에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변화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늘 비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 성경에는 이 비유를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로 쓰여 있습니다.
나무의 비유, 열매의 비유, 회개의 열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땅입니다.
그래서 땅의 비유로 불리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비유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독교 진리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비유는 너무 짧고 내용도 간단합니다.
포도원을 소유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도 심었습니다.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는 번식이 뛰어납니다.
이 나무들은 열매만 쓸 수 있는 나무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땔감 이외에 쓸 수가 없습니다.
포도원에 심어진 무화과나무는 땅도 많이 차지했습니다.
주인이 3년이나 열매를 구했는데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땅만 버릴 수 없으니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가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후에 열매가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혹시 좋지 않으면 그때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포도원주인은 누구일까요?
두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라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공생애 사역에도 불구하고 몇 안 되는 제자들만 따랐습니다.
큰 권능을 베푸셨는데 회개하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그래도 계속 거절하면 그들의 운명이 확정한다는 해석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인인 하나님이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이 거름을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후자의 해석이 내용의 흐름에 어울립니다.
하나님은 열매가 없는데 오래 참았습니다.
여기서 3년을 보통 짧게는 6년 길게 10년을 봅니다.
무화과나무는 2~3년생부터 열매를 맺습니다.
이후 3년은 할례받지 않은 나무라고 해서 열매를 따지 않습니다.
레위기 19: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7년 째는 안식년이라고 해서 열매를 따지 않습니다.
8년째가 되어서 열매를 따려고 했는데 열매가 얻지 못했습니다.
이후 최소한 1~2년을 기다렸다면 거의 10년 가까이 참았습니다.
그런데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오래 참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참지는 않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무가 문제일까요? 땅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땅의 문제로 봤습니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땅을 갈아엎겠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땅이 문제여서, 나무가 문제가 되었고,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가 땅을 바꾸기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보충하기 위해서일까요?
6절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데“로 시작합니다.
1~5절의 이전의 사건을 보충하기 위해 하신 비유입니다.
더 나아가서 12:54~59절에 시대를 분별해서 결단하라는 내용까지 포함됩니다.
1~5절은 실제로 있었던 두 가지 사건입니다.
본도 출신 빌리도총독이 초창기에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군기와 이방 신의 상징들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또 수로 공사를 하는데, 성전 기금을 사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가장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후 갈릴리 순례자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했습니다.
반란을 두려운 빌라도 총독은 군대를 들여보내 제사를 드리는 갈릴리 순례자들을 살육했습니다.
갈릴리 순례자들의 피가 제물의 피에 섞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죄가 커서 그런 죽임을 당하게 되었느냐?
하늘의 벌을 받은 줄 아느냐?
갈릴리 순례자에 속하지 않는 갈릴리 사람들은 죄가 작아서 죽음을 피할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나 너희들이나 죽음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잘나서 모면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건입니다.
실로암이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18명을 향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잘못이 있으니까 당하겠지?
아무 죄도 없는데 당하겠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3과 5절에 동일하게 반복하신 이유입니다.
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불행한 사건을 겪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두 사건을 보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잘못이 있으니까 당하겠지?
아무 죄도 없는데 당하겠어?
일반적으로 뜻하지 않는 크고 작은 사고를 겪은 사람에게 보이는 태도입니다.
힘든 일을 겪는 분들에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고난을, 어려움을,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은 저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두 사건을 말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나은 줄 아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크고 작음은 있지만 모두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음의 불치병에 걸립니다.
히브리서 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래 살다가 편안하게 죽나, 병들어 죽나, 사고로 죽나 다 죽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생명을,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갈릴리 사람이나 예루살렘 사람이나 같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비유는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어서 천벌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나도 심판대 앞에 서는구나.
그런 불행한 사건을 보면, 나도 죽는구나,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신 비유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문제가 무엇인가?
무화과나무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사람이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가?
모두가 죄인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경종은 다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쁜 땅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고 하시면서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회개의 의미를 깨닫도록 보충해서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땅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입니다.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영원한 죽음이 문제입니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회개는 중생 다음입니다.
마치 내가 회개해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어서 그 대가로 거듭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회개해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태어나 보니 죄로 가득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합니다.
나무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땅이 문제이니까 나무가 회개할 수 없습니다.
포도원지기가 해결자로 나옵니다.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8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거름은 똥입니다.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대로 두소서”가 은혜 선포입니다.
똑 같은 헬라어 단어가 등장한 곳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가 헬라어 아우토스 히피네미로 같습니다.
히피네미는 용서하다, 버려두다 등등입니다.
번역이 다를 뿐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신 것입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땅을 갈아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바꾸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의 말씀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이젠 땅을 뒤집어엎어서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 첫 번째 나타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해서 선을 행할 마음이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회복으로 인한 감사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변화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종교행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신 예수님이 열매를 맺도록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습니다.
불행한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집니다.
남의 비극적인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립니다.
욥기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겪는 불행은 죄가 더 커서가 아닙니다.
최근 불행한 사고가 많았습니다.
그중에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1주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자녀가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권사님의 자녀를 망대 붕괴로 죽은 사람처럼 보았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마지막 금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갑자기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죽음은 돌연히 찾아옵니다.
죽음을 맞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이웃을 봅시다.
다윗과 요셉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사건을 볼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이 주님의 때가 이르면 이뤄진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하고 살았습니다.
이 적용을 나에게, 이웃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 사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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