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1~9절
너무 잘 안다는 생각에 피상적으로 넘어가는 말씀이 많습니다.
특히 주일학교 때부터 들었던 예수님의 비유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안다고 생각해서 비유의 본질을 놓치기 쉬운 말씀이 많습니다.
안다는 것과 정확히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말씀도 그중 하나입니다.
1~9절은 비유의 내용입니다.
18~23절은 예수님이 비유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하기 앞선 하신 말씀입니다.
10~17절입니다.
비유 해석에 큰 도움을 줍니다.
비유 해석을 위해 앞뒤 말씀을 살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동안 이 부분을 간과해 왔습니다.
먼저 1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다 아는 쉬운 이야기를 꼭 비유로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11~17절에서 비유로 말한 이유를 밝힙니다.
첫 번째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관한 반응은 두 그룹으로 갈라집니다.
11절에 너희와 그들입니다. 한자리에 있지만 제자와 무리가 나뉩니다.
13절에 듣는 제자와 듣지 못하는 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가 누구인가요?
14절에 이사야 당시는 부패한 마음을 가진 권력자와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와 백성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2절에 큰 무리입니다.
9절의 귀 있는 자와 귀 없는 자입니다.
두 번째는 이사야 소명의 말씀으로 이유를 밝힙니다.
13:14~15절은 이사야 6:9~10절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하나님이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면서 준 사명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뤄졌습니다.
고난 당하신 메시야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지만 당시 백성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과 같은 밭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이 왔습니다.
밭을 만들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이 왔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은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세리 가운데 예수님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밭을 갈아엎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길가와 같이 완고한 사람, 마음에 돌이 있는 사람,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은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들어도 곧바로 잊어버린다.
그들은 옥토가 아닌 땅이기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고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더러 옥토에 떨어진 씨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아엎은 옥토가 되면 상상할 수 없는 열매를 맺습니다.
듣지 않고 보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씨를 뿌릴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비유는 밭이 아니라 씨를 뿌리시는 예수님의 넉넉함을 보셔야 합니다.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뿌리시는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러나 11~17절의 말씀을 빼고 1~9절, 18~23절을 이어서 보면 말씀을 받는 밭의, 마음의 비유로 보입니다.
저도 말씀을 받는 4개의 밭, 마음 상태로 봤습니다.
씨는 동일하데,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마음 밭은 어떤 밭인가?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밭이 있습니다.
씨가 뿌려지고 나면 밭의 상태에 따라 좌우됩니다.
여러분의 현재 어떤 밭입니까?
첫 번째 밭은 길가입니다.
길가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씨가 뿌리를 내릴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씨가 떨어져도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길 위를 굴러다닙니다.
말씀이 겉돕니다. 당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세요.
두 번째는 돌밭과 같은 밭입니다.
돌밭은 겉이 흙으로 덮여 있지만 속에 돌이 들어 있는 밭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즉시 싹이 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뿌리가 내리지 못해 시들어 버립니다.
돌밭은 마음은 말씀을 즉각 반응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돌을 제거하세요.
세 번째 가시덤불 밭입니다.
가시덤불 밭은 좋은 흙입니다.
돌도 없고 단단하지도 않습니다.
땅이 좋아서 먼저 가시덤불이 자라게 됩니다.
가시덤불은 씨앗이 자랄 수 있는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가시덤불의 사람은 심성이 착한 사람입니다.
염려와 걱정을 태워야 합니다.
네 번째 좋은 땅입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다.
밭만 좋으면 100, 60, 30배 결실을 맺습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닙니다.
3절은 “씨 뿌린 자”로 하셨고 18절에 “씨 뿌린 비유”라고 개역개정판은 번역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 새 번역은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 NIV은 “of the sower means”로 번영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가 말씀을 밭이나 마음을 강조하면서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옥토와 같은 마음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딱딱한 길가와 같은 밭이 스스로 갈아엎어서 옥토로 만들 수 있을까?
돌밭과 같은 밭이 스스로 돌을 골라내서 옥토가 될 수 있을까?
땅이 옥토로 되는 것은 농부의 역할인가? 밭의 역할인가?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 겪는 성도에게 적용해야 하는가?
그러면 비유와 시점과도 맞지 않습니다.
또 4가지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적용한다면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9:7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구원받을 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바꾸지 못합니다.
마음이나 밭이 바뀌는 것은 원해서 되는 것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뿌리는 자는 예수님이고, 씨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뿌리는데, 모두에게 뿌립니다.
2절에 큰 무리에게 뿌립니다.
세리,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모두에게 뿌립니다.
그렇다고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큰 무리가 천국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천국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큰 무리는 눈이 없고, 귀가 없어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 있는 자가 있습니다.
16절의 말씀처럼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래서 씨가 밟혀 죽고, 막혀 죽고, 타 죽고 그리고 끝인가요?
더러 옥토에 뿌려집니다.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
말씀을 깨닫는 자가 있습니다.
오늘 비유를 씨뿌리는 자의 넉넉함을 보셔야 합니다.
씨가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져도 묵묵히 뿌리고 있습니다.
많이 뿌립니다.
가능성이 없는 그곳에서도 뿌립니다.
제대로만 뿌려지면 백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속상해하지 않습니다.
낙망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갖고 뿌립니다.
더러 좋은 땅과 같은 마태와 같은 세리에게,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에게, 니고데모에게 뿌려진 씨는 100배 이상의 결실을 맺습니다.
1~9절에서 비유로 하시고 18~23절에 해석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넷째 제자는 더 나아가 우리는 충분히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인 제자에게 뿌려진 씨는 100배, 60배, 30배 결실을 거둘 겁니다.
이는 밭의 능력이 아니라 씨의 능력입니다.
씨뿌리는 그분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니가 아니라 내가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힘내라고 합니다.
갈고 엎어서 좋은 땅이 된 제자에게는 100, 60, 3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기대하고 소망하라고 하십니다.
매일 비슷한 날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너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인 우리가 좋은 땅인 것을 느끼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멋지게 시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누룩같이 천국은 시작합니다.
뿌려진 씨의 대부분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초라합니다.
실패만 가득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다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알았을까요?
이렇게 커진 천국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러나 천국은 연역하고 자랑할 것 없는 사람을 통해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나중에 천국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조선 땅까지 복음이 전해질 정도로 퍼졌습니다.
자라게 하신 분으로 인해 커집니다.
씨뿌리는 자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강함의 기준이 다를 뿐입니다.
세상과 기준이 다를 뿐입니다.
천국은 절대로 약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무기, 목소리 큰 사람이 강합니다.
천국은 참는 것, 온유함이 강합니다.
너희에게 허락되었다고 격려한 이유입니다.
예수로 주를 고백하는 이는 좋은 땅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하심을 입은 좋은 땅입니다.
우리에겐 씨가 뿌려져 있습니다.
넘어졌다 또 일어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길 바랍니다.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고 제자이고 우리들입니다.
그 분에게는 천국의 열매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적용) 귀 있는 자가 됩시다.
1/4의 확률입니다.
진리로 듣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진리를 듣고 깨닫는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일하고, 밥 먹고, 자고, 나이가 들면서 고장나고입니다.
역사에 남을 만한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일예배 드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택하신 주의 백성을 통해 이 땅의 천국을 확장해 갑니다.
택하신 좋은 땅 된 우리는 소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묵묵히 씨 뿌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00배 결실을 소망하면서 뿌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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