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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온유와 관용을 베우세요

by ysong 2023. 7. 18.

고린도후서 10:1~11

살면서 많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갈등은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심하게는 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공격받을 때 진가가, 인격이 드러납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할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따라다니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싸웠나?

본문의 짧은 말씀을 통해서 싸움의 기술, 싸움의 방법, 싸움의 결과를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바울을 넘어뜨리고 싶은 사람들로 즐비했습니다.

고린도뿐만 아니라 빌립보, 데살로니가, 에베소 심지어 로마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넘어지게 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대다수 고린도 교인과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1~2, 10절에서 그들이 했던 비방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절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10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함께 있을 때는 소심한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담대하다는 비방입니다.

대면하여 말할 때는 유순하게 하지만 편지로는 강하게 했다는 비방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에 따라 행동한다는 비방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이중적이고, 치사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바울의 외모까지 지적했습니다.

바울은 못생겼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대머리이고, 매부리코에다가 눈썹의 간격이 넓고, 눈은 처졌다고 합니다.

비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아서 바울의 외모가 형편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겪어야 할 갈등으로, 관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관용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바울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 모세도 그랬습니다.

민수기 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자신이 정한 의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죽일 정도로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했습니다.

민수기는 모세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행동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7~8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유순한 자가 되었습니다.

유모가 자녀를 기름같이 교인들을 대했습니다.

바울은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온유와 겸손을 계속 배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유와 관용을 배운 바울은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았습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의 의미는 육신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찌르는 말과 행동에 인간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찌르는 말에, 행동에 육신이 반응하는가? 내 영이 반응하는가?

내 자신이 영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영이 반응합니다.

자신이 육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육신이 반응합니다.

육신으로 반응하는 분들은 세상의 기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육신에 속해 있으면 외모만 봅니다.

겉만 봅니다.

육신에 속해 있으면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바울은 7절에서 너희들이 외모만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속한 나를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급기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폭력은 불신앙입니다.

자기가 해결하겠다는 불신앙입니다.

자기가 판결하는 불신앙입니다.

 

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분명하게 육신 속에 있지만 육신에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육신 안에 주님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쫓아 살아갔습니다.

주님의 온유와 관용에 따라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영이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거의 1년 만에 만난 후배 목사님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사역을 잘하고 있는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명예를 줄 만한 큰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고민과 걱정이 동시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제안에 흔들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욕망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아니라 자신임을 알게 된 후배 목사님은 제안을 거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배 목사님은 순수하셔서 앞으로 고난의 사역을 감당하겠지만 육신에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 져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웠습니다.

4~5절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절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바울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배후가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막대기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막대기를 쥐고 때리는 자를 본 것입니다.

바울은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무기로는 배후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배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이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배후는 여리고성과 같습니다.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요새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는 모든 논리를 무너뜨립니다.

인간의 논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는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는 모든 생각을 이끌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온유와 관용입니다.

온유와 관용의 능력 앞에 서 있을 때 모든 이론, 교만이 무너집니다.

온유와 관용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너뜨리는 것만 하지 않습니다.

연역한 사람을, 지친 사람을, 힘든 사람을 세우는 데 쓰이는 무기입니다.

8절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끝까지 온유와 관용으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무기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입니다.

바울의 개인 관계의 핵심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힘이 온유입니다.

어른인 내가 참는다는 것이 온유입니다.

약한 자를 변호할 때 의롭게 행동하고, 자신을 변호할 때 참는 것이 온유입니다.

오른 것의 더 오른 것이 관용입니다.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 관용입니다.

바울은 그들조차도 세우려고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견고한 진과 사람들은 바울을 비방할까요?

그들은 바울을 끄집어 내리면 자신이 올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깎아내리면 자신은 옳고 의롭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이유일 겁니다.

대적자들의 말과 행동이 육신의 무기입니다.

육신의 무기는 죽이는데 강력하지만, 세우는데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온유와 관용은 바울이 부여받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권위입니다.

 

적용) 온유와 관용의 무기의 능력을 믿어요.

내가 비방하고 비난할까요?

내가 혈기를 부릴까요?

내가 왜 폭력을 행사할까요?

 

육신에 속한 사람의 힘과 비려합니다.

자신의 힘이 약하면 비난합니다.

자신의 힘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혈기를 부립니다.

자신의 힘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행사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하나의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힘이 없어도 온유와 관용합니다.

내와 힘이 비슷해도 온유와 관용입니다.

나보다 힘이 세도 온유와 관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이 능력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비난하는 자들을 어떻게 했는지,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배워야 합니다.

바울이 거짓선지자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교회에 어떻게 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온유와 관용이 모든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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