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7~18절
성도들마다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은혜 받는 말씀도 각각 다릅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 읽으면 위로받는 책이 있습니다.
구약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가 고난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전하는 모습에 위로받습니다.
신약은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이 많은 고난 가운데도 전도에 힘쓰는 모습에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두 분을 통해 신앙은 고난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사는 인생을 그리스도인의 진한 향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 바울의 솔직한 인생관과 신앙관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강한 분 같은데, 눈물도 많고, 사랑도 많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깨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1절, 8절, 16절에서 자신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 3가지 신앙의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는 바울은 맡겨진 일에 대한 태도가 달랐습니다.(2절)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바울은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바울은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환히 드러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웠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순수함으로 자기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추천서를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었던 거짓 교사들과 이러면에 달랐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평가나 뒷이야기를 들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들려오는 오해와 소문에 대해 스스로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 2절은 어떻게 일어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위대한 직무라는 의식을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나에게 맡겨졌다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어떻게 이런 귀한 일을 맡겼나!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사람께 쓰임 받고 결국 소모품으로 버려집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셨는가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직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크고 중요한 것과 무관합니다.
작은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어도 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도 저는 영향력이 없습니다.
잘나가는 친구 목사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도 인간인데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확신으로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낙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4절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더불어 개인적인 사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4절의 말씀처럼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베소서 2:2절),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면서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혼미케 한 신=사탄=그리스도가 안 보이게 한 가라지로 가득합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잘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의 시절에 영화를 보다가 마음이 혼미해졌습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공의와 정의가 없을 수 있느냐는 대사였다고 합니다.
그 대사를 듣고 보니까 정말로 신이 없는 현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후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다시 믿어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혼미하게 되니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혼잡하게 되는 것은 네가 주인이 되라, 네가 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혼미케 하는 신에 사로잡히면 말씀이 안들립니다. 안 믿어집니다.
혼미케 하는 신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바울은 혼잡하지 않게 전했습니다.
가끔씩 우리를 광야로 가게 합니다.
왜요?
주님께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빛이 없으면 우울해집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마음에 빛이 없으면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영광이 빛이 마음에 가득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맡긴 직분, 직무에 대해 확신하면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둘째는 바울은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했습니다.(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흙으로 빚은 그릇이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약하고 잘 깨지기 쉽습니다.
깨지지 쉬운 질그릇이 외부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우껴쌈을 당했습니다. 싸이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했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버려지지 않습니다.
거꾸려뜨림(맞아서 쓰러짐)을 당했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질그릇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 안에 보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은 흙으로 빚은 질그릇, 흙으로 돌아가는 질그릇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질그릇을 은그릇 금그릇으로 바꿔 포장합니다.
포장하는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질그릇에 은금으로 도금하다가 끝납니다.
세상은 성공하려고 걷다가 실패합니다.
신앙인도 이런 착각을 합니다.
자신이 은그릇, 금그릇으로 도금하여 쓰임 받게 해 달라고 합니다.
금그릇으로 도금된 강한 모세가 무엇을 했나요?
살인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정립됩니다.
내가 약해져야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질그릇으로 빚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연약한 질그릇에 담긴 이유는 보배가 더 드러나게 하기 위합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약함을 인정해야 강한 것을 붙들 수 있습니다.
보배를 바라보며 붙잡아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약하다, 나에게 붙어 있어야 강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열왕기하 6장은 우겨쌈을 당한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와 게하시가 머문 성을 에워 쌓았습니다.
게하시가 우겨쌈을 당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했습니다.
눈이 열린 게하시가 아람군대를 에워 쌓은 천군천사를 봤습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예레미야 18장은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으로 내려가라고 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만들다가 진흙이 터졌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 18:16절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우리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보배를 넣어서 보배가 충만한 질그릇으로 빚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질그릇이 아니라 옹기가 되면 안됩니다.
예레미야는 19장은 잘못된 상태로 굳어버린 옹기에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옹기를 깨뜨립니다.
보배가 들어 있지 않은 채 굳어버린 옹기가 되질 않길 바랍니다.
우리는 보배가 가득한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봤습니다.(16~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다른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속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영광을 바라봐야 합니다.
의미를 바라봐야 합니다.
시간적으로 짧다, 무게는 가볍습니다.
영원한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겉 사람을 보기 때문에 낙심합니다.
20대 초반을 기준으로 삼고 자신이 늙었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어감을 인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낡아집니다.
명예와 권력도 나를 떠나갑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난을 바라볼 때 낙심합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속사람을 성찰하고 다듬는 것입니다.
못생겼는데 정이 갑니다.
영원한 것을 보았기에 잠시 보이는 것에 묶이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면서 사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히브리서 11:27절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고 보이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는 스스로 낙심할 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3가지 신앙의 교훈으로 불청객을 용납하지 않길 바랍니다.
적용) 우리는 보배가 담겨진 질그릇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관점에서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는가?
오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면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보배는 아무런 곳에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귀한 보배를 가장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에 두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 우리 속에 넣어 두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분에 안에서만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길 원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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