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5~24절
고린도전후서를 살펴보면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신앙성장은 고상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충돌하기도 하고, 사람과 이견으로 갈등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단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는 과정을 겪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도 사이의 갈등, 의견 차이, 교인들과 사역자들의 오해를 겪으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지상 교회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도 그 과정을 겪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주님이 원하는 방향을 이끌어 가실 겁니다.
지난주 주님이 주시는 위로로 살았나요?
저는 성실교회 교통선교회의 헌신과 전도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매주 우리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받길 바랍니다.
오해로 인해 마음고생하신 적이 없습니까?
바울도 오해받았습니다.
바울이 오해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풀어가셨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도 오해로 묶이지 않는 신앙생활을 배우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오해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오해를 받는 편인가요?
책임지는 자리, 일하는 자리에 있으면 상대적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저와 사모도 오해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솔직해도 오해받고, 너무 말이 없어도 오해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왜 오해하고, 오해받게 될까요?
바울은 무엇 때문에 오해받았을까요?
말만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오해였습니다.
바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방문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모욕을 당했습니다.
에베소로 돌아가면서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눈물로 쓴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 보냈습니다.
바울이 다시 방문하지 않자 힐난하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했던 거짓사역자들이 이것을 빌미 삼아 맹렬하게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자신이 말한 약속도 지키지 않는 이중적인 사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오해받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오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3~14절입니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절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부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지신은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오해는 자기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상대방을 판단한다는 것이 그만큼 위험합니다.
성경은 오해=판단=교만은 한 식구로 봅니다.
우리가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날까지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알아야 합니다.
결혼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부터 알아가기 위해서는 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아는데 다 안다고 생각하면 오해하게 됩니다.
내가 전체를 알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인간관계가 깨지지 않습니다.
더 많이 알게 되면 서로 자랑거리로 가득할 것입니다.
더 많이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그래도 덜 오해하면서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도 긍휼히 필요하고, 자 사람도 긍휼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나도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저 사람도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생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숱하게 범한 오해는 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쇼핑센터가 아닙니다.
오해를 넘어가면서 다듬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도 그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성숙해 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고, 다른 교회도 그렇고,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이 다듬어가는 곳입니다.
그런 주님께 자신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어떻게 오해를 풀었을까요?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행동에는 이중적인이지 않았습니다.
17절입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나는 겉으로 예하고 속으로 아니오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
세상적인 지혜인 권모술수로 살지 않는다.
속으로 아니오 하면서 겉으로 예 했겠느냐.
내가 이중인격자이겠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실성을 하나님을 근거해서 주장했습니다.
18절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나도 신실하게 살 수밖에 없다.
나의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갈려고 했는데, 못 갈 사정이 있었다.
나는 언약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면 말을 번복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전한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예만 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겉으로 예하고 속으로 아니오 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만 하신 분입니다.
예스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말씀에 우리가 아멘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서 주님의 말씀에 ‘예’로, 약속에 대한 ‘예’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믿을 만한 성품으로 사회생활을 합니다.
약속을 붙들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신실합니다.
성품, 사람 됨이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예수를 믿는 나의 인격을 믿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바울의 생활에는 숨은 행동이라든가, 숨은 동기라든가, 숨은 뜻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본 받을 점입니다.
바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바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고린도교인들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대로 곧바로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으면 큰 사단이 났을 겁니다.
사도는 치리와 권징의 권한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때 갔으면 많은 교인을 치리와 권징으로 징계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아끼는 마음으로 성도가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약속을 변경하는 일이 생긴 것은 타인을 아끼는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이중인격자로 오해받았지만 신실하신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천천히 가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동기가 예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분들이 있고, 약속하고 미루는 분들도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다가 체포된 도산 안창호선생님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윤봉길의사 의거로 어수선한 때였습니다.
윤봉길의사에게 수류탄을 제공해 분이 이유필선생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이유필을 체포하려고 눈을 붉히고 있을 때였습니다.
안창호선생은 그것도 모르고 이유필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이유는 그의 아들인 이만영과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이만영은 한국소년동맹회 회장이었습니다.
소년동맹회에서는 5월 첫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체육대회를 열었습니다.
안창호선생은 이 대회 경비 5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려다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약속을 불가피하게 못 지키는 일도 있고,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도 있습니다.
잠언 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마음으로 계획하지만 이뤄지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시127:1~2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죽도록 일하고 허사가 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죽도록 일했는데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면 안되는 겁니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든, 하나님이 막으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적용) 가능한 한 약속한 것은 지키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도 약속에 대한 원칙을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교사의 행동과 품성에 대한 유대교 규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교사는 자신이 하지 못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은 결코 학생들에게 약속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면 그것은 학생들에게 거짓말하는 관습을 길러 주게 된다는 이유입니다.
약속은 쉽게 할 것이 아니란 경고이기도 합니다.
레위기에 서원에 대한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가벼운 약속은 가볍게 깨지게 마련입니다.
약속하기에 앞서 그 약속을 지키기에 필요한 희생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희생을 치를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약속을 했지만, 계획을 했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막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막으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타인에게 유익이 되면 경우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한 약속은 지키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은 말하면 분명히 지키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쌓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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