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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타인을 위한 절제

by ysong 2023. 4. 17.

로마서 14:21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봉사, 전도, 헌금생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보다 어려운 것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일상에서 느끼기는 하나님의 관계보다 사람의 관계가 더 어렵게 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은 영적 예배자로 은사대로 섬기라고 12장에 짧게 다룬 후, 13, 14, 15장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길게, 자세히 다룬 까닭은 사람과의 관계가 그만큼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교회마다 문제는 있습니다. 2천년 전(우리나라의 고구려시대)에 있었던 로마교회에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으로 다수를 차지해서 영향력이 강하고, 고기를 먹는 자과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으로 소수를 차지해서 힘이 약하고 채식주의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와 생활패턴의 차이로 신앙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의견차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벌어지면서 결국 표면적으로 두 팀으로 갈라져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갈등한 문제는 본질적인 진리이기보다는 고기를 먹는 문제와 예배드리는 날의 문제,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였습니다. 다소 사소한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멀리 떨어진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소식이 들릴 정도로 쾌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지난주 본문인 14:1~12절은 바울이 갈등하고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 중 약한 자들을 향해 말씀을 주로 하면서 비판하지 말고, 모두를 하나님이 받아들였고, 예수님이 세우셨듯이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13~23절은 강한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강한 자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의 절제는 우리사회의 약한 자로 지칭되는 감정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사실인데 반해 바울은 타인을 위해 절제할 대상이 강한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약한 자는 비판을 많이 하고, 강한자는 절제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현실입니다. 조화롭기 위해서는 비판보다는 받아들이는 쪽으로, 자유보다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가 타인을 위해 절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1. 약한 자의 걸림돌이 되지 마세요.(13)

13절은 강한 자들이 자유롭게 고기를 먹는 것이 약한 자들을 넘어지도록 하는 걸림돌이나 함정이 되었는지 판단하라고 합니다.

 

비록 너희들이 먹는 고기가 신앙의 양심에 비춰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걸림돌 되고, 부정한 것이 됩니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이유를 14, 15절과 20, 2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14, 20절은 모든 음식이 부정하지 않다는 신학적인 지식이 옳더라도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이 되고 악이 됩니다.

 

15, 21절은 음식으로 형제가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소한 문제로 취급하면서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은 1) 사랑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고 2)상대방을 멸망시키는 꼴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약한 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16절 음식에 관한 관례에 매이지 않는 자유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약한 자를 영적인 위험에 빠지게 하면 그 선이 금세 비방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타인이 넘어지도록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13~16절의 말씀을 보면서 저는 이런 묵상을 했습니다. “나는 상대방이 넘어지도록 하는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나의 그동안의 짧은 인생이 걸림돌의 인생이었던가? 아니면 디딤돌의 인생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이니까요. 어떤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고, 어떤 이들에게는 디딤돌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철이 없던 시절, 예수님을 깊게 만나지 못했던 시절이 대부분 걸림돌의 인생이었습니다.

 

? 그 시절에는 디딤돌보다는 걸림돌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제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욕심, 높아짐에 욕심, 돈의 욕심에 사로잡혀서 모든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는 교만이 걸림돌의 원인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전통과 교만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에게 선하고 신실하신 예수님이 걸림돌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에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놓고 논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급하게 교회에 가시는 분이 있다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교회를 가는 중에 길에 넘어져 심각한 상태에 빠진 분을 발견했습니다. 급하게 돌보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넘어진 분을 위해 119에 전화를 하고, 모든 조치를 취하게 되면 예배에 참석할 수 없거나 아주 늦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 분은 넘어진 분을 도와주다가 결국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분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은 건가요? 비록 예배에 늦어 드릴 수 없었지만 쓰러져 있는 그 분을 조치하는 그 시간이 예배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만 이용하면서, 걸림돌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디딤돌이 아닌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상대방에 따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바리새인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디딤돌이며 구원자이었습니다.

 

교회가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당연히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왜요? 교회가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독단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이 많아서입니다. 화려한 예루살렘성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물질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현재 상대방에게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나는 어디에 빠져 있는가? 어디에 빠져 있기에 상대방을 넘어지도록 하는 걸림돌의 역할을 많이 하는가? 더 나아가 경쟁자를 곤란에 빠트리기 위해 함정을 파고 있는가?

 

나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나는 아내가, 남편이 나의 디딤돌이 되길만을 바라며 강요하는 편인가? 나는 친구들에게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거래처와 상생을 추구하는 디딤돌인가?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상대방을 비판하기보다는 자신들이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를 판단하라고 합니다.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상대방을 세우고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인가? 낮아짐으로, 겸손함으로, 타인을 위해 권리를 절제함으로 상대방을 세우는 디딤돌인가?를 판단하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약한 자들이 딛고 올라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한 자가 타인을 위해 절제하기 위해서는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19)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상호간의 조화가 덕을 세우는 길입니다. 서로에게 덕이 되는 일입니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기 위해 꼭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7~18절입니다. 17절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이기적인 이득과 먹고 마시는 즐거움보다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간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해야 합니다.

의는 도덕적인 정직함을 가리킵니다. 평강은 수평적인 조화를 가리킵니다. 이런 복이 내재할 때 희락이 발생합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시고 싶은 것 마셨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주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의 심령에 있습니다. 의와 평강 희락이 넘치는 심령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그 아름답고 거룩한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의 가정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는 성도들의 교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외형적인 것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를 놓고 그들의 믿음을 판단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어서 부자가 되었지, 건강하게 되었지, 성공하게 되었지,,,예수님께 징계를 받아서 가난하게 되었지, 질병에 걸리게 되었지, 실패하게 되었지라고,,, 이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저분은 부자인데, 성공했는데 믿음을 버리지 않고 겸손하네, 통장잔고가 없는 사람이...냉장고가 비어있는 사람이..가족을 먼저 보낸 사람인데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하네,,,외형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합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주일예배를 기다리며, 예배를 드리는 것에 감격하는 분이 계십니다. 과거와 비해 생활형편이 달라진 게 없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을 맛보면서 심령 안에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먹고 마심에 있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깨달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분들만이 서로 덕을 세우는데 힘쓸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성숙하여 모든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덕을 세우시는 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18절은 강한 자는 예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강한 자는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게 됩니다.

 

나는 평화를 깨는 사람인가? 나는 나만을 드러내는 사람인가?” 덕을 세우는 힘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 힘쓰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종이 되길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바탕으로 19절의 말씀처럼 성도간의 평화을, 세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평화로운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세워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강한 자는 타인을 위해 절제하기 위해서는 3.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세야 합니다(21)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더 연약한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21절에서 먹는 것이 형제를 거리끼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은 22, 2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자신들의 견해를 떠들고 다니거나, 동료 신자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확신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신앙을 주신 복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논쟁중인 문제에 대한 확신을 자신들에게로만 한정할 것을 촉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확신을 주장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사람을 모으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모아서 더 힘을 키우려는 행동이 자유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라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연약한 신자는 강한 자에게 설득되어 자기가 믿는 바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일을 행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마음의 확신이 올 때까지 분위기에 휩쓸려서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섵부른 동조에 대한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자신의 신앙적인 확신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로 응답 받은 분은 기도만을 강요하고, 찬송으로 은혜를 받은 분은 찬송만을 강요하고, 봉사로 복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분은 봉사만을 강요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자며 교회에서 사조직을 만들어, 분위기에 휩쓸려 만들어진 사조직은 나중에는 교회에 큰 분란의 불씨가 되는 것을 봤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고기를 먹는 문제로 인해 갈등하게 되었는데, 고전 8:11~13절에서 동일하게 자유를 제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약한자=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그들의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 미숙한 단계에 있었습니다. 강한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확신을 강요하기 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제한해야 합니다.

 

강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까지, 진리가 자유롭게 할 때까지,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은 약속과 성취 사이에 있는 단어는 기다림의 인내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75세 약속을 받았지만 순식간에 성취되지 않고 25년을 기다림의 인내가 있습니다. 요셉은 17세 자기 부모형제가 자기에게 경배하는 꿈을 꾼 것이 성취되기까지는 13년의 인내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출애굽을 위해 40년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인내의 기간이 다 같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때 혹은 기간이 왜 사람마다 동일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체질이 다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감기 환자일지라도 환자의 증세와 체질에 따라 의사의 처방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영적 체질과 삶의 모양은 열이면 열 다 다릅니다. 이처럼 각각 상이한 체질을 누구보다도 개별적으로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맞도록 인내의 기간과 약속 성취의 때를 부작용 없이 결정해 주십니다.

 

열매를 맺을 때까지 강한 자는 기다리며 자유를 절제해야 합니다. 자유자만이 절제할 수 있습니다. 중독자는 절제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입으로, 내 돈으로, 내 권력으로 자유를 행사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합니다.” 절제가 동반되지 않는 자유는 자유일수 없고 방종에 불과합니다. “내 방식으로, 내가 좋은대로, 내 주장대로가 아닌 모든 자유를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학생들, 여러분들을 낳아주신 부모를 위해 절제하십시오. 부모님들,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절제하십시오. 절제가 능력입니다. 신앙의 성숙입니다. 절제가 가능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걸림돌의 인생을 살아 왔습니까? 디딤돌 인생을 살아 왔습니까? 상대방의 덕을 세우는 말을 많이 했습니까? 힘을 빼는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을 했습니까? 타인을 위해 나에게 주워진 권리와 권한을 스스로 제한 한 적이 많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경우 오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무리기도

로마교회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인해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13, 14, 15절의 말씀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오늘 타인을 위해 절제 할 것을 결심합니다. 나는 디딤돌 인생이었던가 걸림돌의 인생이었던가를 생각하며 앞으로 디딤돌의 인생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덕을 세우고,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포기하고 자유를 제한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유조차도 제한 할 수 있는 절제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제목

1. 나는 걸림돌의 인생이었던가? 디딤돌의 인생이었던가를 생각하면서, 그동안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걸림돌의 인생이었다면 이제부터 디딤돌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을 살리고 세울 수 있는 디딤돌의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2. 덕을 세우기 위해 우리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조차 스스로 제한 할 수 있는 능력의 신자가 되길 원합니다. 내 주장만 맞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고집에서 벗어나 기다려 줄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의 자녀되게 해 주시옵소서. ,놀고싶고,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부활과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충만케 하심과 교제케 하심이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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