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6~8절
요즘 생각이 드는 것은 신앙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질 때 강력한 파워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 칭의(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선물), 성화(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순종하는 삶), 영화(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영생의 삶)에 대해서 로마서 1~11장까지 배웠고, 구원받은 자가 이 땅에서 마땅히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씀을 12~13장에 걸쳐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들은 12~13장을 통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자, 은사대로 섬기자,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서로 우애하자, 아름다운 사회생활을 위해 타인을 저주하지 말자, 권세자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태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사용하자, 예수님께 사랑의 빚진 자로 살자, 어둠의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빛의 갑옷을 입자 등의 제목의 설교를 통해 삶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배운 대로, 기준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 넘어져서 정작 말씀의 권능을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꾸만 인생에서 작은 성공을 거든 세상적인 방법으로 돌아가면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한 위대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14~15장은 다시 교회공동체 안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 교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의견의 차이로 발생하는 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의견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2천전의 성도들이나 한반도에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이나 비슷한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로마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신앙의 감격도 다를 텐데, 겪는 문제는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교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의견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두 종류의 사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3절)
로마교회에는 무슨 믿음의 견해 차이가 있었을까요? 고기를 먹는 문제, 예배드리는 날에 대한 문제,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로 인해 신앙적인 견해 차이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에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진보적인 편이었습니다. 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적은 숫자이지만 구약의 정결예식을 중하게 여기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보수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갖고 있는 인종과 문화 차이는 믿음의 견해 차이로 나타났으며, 특히 먹는 문제와 예배드리는 날로 인해 갈등했습니다.
2절에는 그 두 종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먹는 자=강한 자=이방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든 음식을 허락하셨는데 하면서 자유롭게 고기를 먹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채식주의 자=약한자=유대인 그리스도인입니다.
3절에 믿음이 강한 자=먹는 자=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소수인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업신여겼습니다. 여기서 업신여긴다는 것은 하찮은 것들에 어리석게도 매달려 있는 자들로 취급했다는 의미입니다.
먹는 자, 강한 자는 약한 자들을 숫자와 여론의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복음 지식에 대한 자부심과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약한 자를 향해서 “아직도 저런 단계에서 머물러 있다”고 하면서 업신여겼습니다.
반면 먹지 않는 자=약한 자=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경건과 의의 참된 기준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기준에 미달된 먹는 자=강한 자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모세의 정결예식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경멸했습니다. 강한 자들의 행동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멸시와 정죄의 눈빛을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가 옳은지를 판단을 한다면 누구의 편에 손을 들어 줄 것 같습니까? 숫자적으로 밀리는 약한 자를,,,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강한 자를,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 어떤 교파,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똑같은 문제를 놓고도 의견이 달리하지 않습니까? 이런 견해 차이로 교회 안에서 보수파와 진보파 혹은 강견파와 온건파가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문제를 만나면, 로마교회 성도들처럼 업신여길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음식문제는 종교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담배와 술을 마시는 분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합니까? 술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성도와 술과 담배를 피우는 성도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다면,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강한 자가 업신여기고, 적은 숫자를 차지하는 약한 자가 비판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교회는 술과 담배를 피우는 자를 죄의식에 사로잡히도록 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릴 때, 술과 담배가 구원과 연결된 것처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실수하지 않도록 절제하도록 합니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송태근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현재 전병욱목사가 좇겨난 삼일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강남교회를 부임하게 되었을 때 일입니다. 부임하게 된 송목사님이 목회의 조언을 받기 위해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신 고 옥한흠목사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목회에 대한 노하우를 듣고 싶은 마음으로 기대가 컸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시던 고 옥한흠목사님이 목회를 위한 조언을 한다고 하시면서 “주보에 있는 글자 하나도 3년 동안 바꾸지 말고, 교회의 어떤 물건도 바꾸지 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 실망을 많이 했는데, 목회를 하면서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갈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으로 감정이 상하고, 다툼이 일어나 분란이 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지상에 있는 교회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10가지의 교회문제로 갈등을 했고, 갈라디교회는 율법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에 따라 분열되었고, 빌립보교회는 영향력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으로 인해 갈등했습니다.
이처럼 비본질적인 문제이지만 교회에 있을 의견 차이에 대한 해답은 1절에 업신여기지 말고,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라고 합니다. 받아들여 하는 이유는 3절 하반절과 4절 하반절에서 각각 밝히고 있습니다. 3절 하반절에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그러니 너희들도 받아들여라, 4절 하반절에 “이는 그가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입니다.
3절을 읽어보세요. 3절은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약한 자든 강한 자든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투고 있는 문제는 구원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로 양심상의 의견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는 믿음이 약한 자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든 약한 자든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궁극적으로 판단하는 분이 주님이지 동료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인끼리 하인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 주님의 식솔입니다. 하인들이 주인의 행사를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넘어지게 하든 서게 하든 그 권능은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강한 자는 강한 자에게 맞게 훈련을 시킬 것이고, 약한 자는 약한 자에 맞는 훈련을 시켜서 모두 설 수 있는 자로 만드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가 공존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고, 나와 다른 판단을 갖고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일을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두 종류의 사람을 받으셨고, 예수님이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업신여기는 태도와 비판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저도 과거에는 비판이 사람을 바르게 세울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더 파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판보다 주님이 세우시는 것이 더 파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양주 성실교회 성도님들은 받아들이는 쪽을, 주님이 세우시는 쪽에 서 있는 믿음이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의견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6절)가 중요합니다.
5절에는 날의 문제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금요일저녁부터 토요일저녁때까지는 거룩하게 지키지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365일이 모두 주님의 날이라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의 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약한 자는 이 날을 저 날보다 중하게 여겼고, 강한 자는 모든 날을 같게 여겼습니다. 이런 갈등에 대한 대답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확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따라 확정하는데 있어서 원리가 있습니다. 6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라고 묻고,,,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종교적인 행사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경우도 많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이 행한 금송아지신상의 사건입니다. 출 32:1~6,,모세를 애굽에서 인도한 사람으로 높였습니다. 더나아가 금송아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한 신으로 높였습니다. 그 금송아지신상 앞에서 번제, 화목제를 드리고 뛰놀았습니다. 누가 빠졌습니까?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출애굽의 이루신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바친 금고리(헌금), 그들의 제사(예배), 그들의 뛰어놈(열정)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열심히 높습니다. 금식을 자주 했습니다. 스가랴 7:5~6절을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4,5.7.10월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누구를 위한 종교적인 열심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종교적인 열심을 냈습니다. 하나님을 앞에 내세웠지만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도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보십시요?
눅 18: 10~12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것이 누구를 위한 기도입니까?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까?
수락산에 올라가는데 절에 바쳐진 기왓장이 쌓여 있는 것을 봤습니다. 기왓장마다 자신의 이름이 써 있는 것을 봤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종교적인 열심히 아닙니까? 교회건축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기며 “000기념관”, “000가 세운 교회”를 봅니다. 누구를 위한 건축입니까? 자기 이름을 내세우신 분들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잘 살펴보십시요?
많은 분들이 주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사로운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단정치를 하시는 분들은 총회를 위한다고 하지만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분열된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를 위한다고 하지만 재물, 지분 등 다양한 욕심에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욕망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면서 나를 드러낸다면 이 설교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찬양팀이 찬양을 하는데 자신의 목소리와 음악성을 뽐내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공치사를 일삼으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늘 물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양심을 갖고 물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8절의 말씀처럼 “살아서나 죽어서나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양주 성실교회 성도님들은 주님을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를 신앙의 양심으로 물을 수 있는 깨어있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의견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3. 모두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12절)
경멸하는 자나 비판하는 자나 모두 하나님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때 자기 입으로 업신여긴 사실과 비판했던 사실을 직고하게 됩니다. 혀가 고백을 할 것입니다. 양심을 속이고 겉으로 의인처럼 행동했던 것까지 말하게 됩니다.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때 부끄럽지 않도록 지금 업신여기거나 비판을 자제하고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도록 힘씁시다. 무슨 일이든 주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를 묻고 행동합시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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