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10~3:4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갈라짐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갈라짐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신앙을 점검했습니다.
세례, 십자가, 부르심이라는 기독교교리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1년6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가르쳤을 겁니다.
그 가르침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니까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의 복원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합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말씀에 자신을 던져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진단하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빼도, 교회에서 하는 일의 95%는 계속할 것입니다.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을 빼면, 그들이 행하는 일의 95%는 멈추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그 차이를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성령을 빼면 95%가 멈출 수밖에 없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교회에서 일하시록 우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순종하여 태도와 삶의 바꾸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보통 나이가 들면 근육이 굳어진다고 하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유연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입니다.
뜻의 맞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함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동력도 성령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따를 때 진정한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성령에 이끄심에 따르는데 부족했습니다.
도리어 사람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가 갈라짐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하면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성령에 순종하는 영의 사람이 될 때 교회다운 모습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했을까요?
보통 세상은 세상은 문벌, 가문, 학벌과 같은 세상의 기준으로 구분합니다.
유익한 사람과 무익한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유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합니다.
바울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었을까요?
바울은 먼저 사람을 성령의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또 성령의 사람 중에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그렇게 구분한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음으로는 성령에 온전히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그렇게 구분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고 구분하는 이유를 2: 10~1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에서 행하는 선교를 낭비라고 여깁니다.
세상은 모여 예배하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사서 고생하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과 말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11절)과 은혜로 주신 것(12절)은 무엇일까요?
11절에 하나님의 일=성령의 일=십자가의 도=복음입니다.
12절에 하나님이 이것을 값없이 선물로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할 때 분명하게 내 삶에 드러납니다.
왜 십자가의 도일까요?
십자가만이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킬 수 있고, 새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 2;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육체적, 물질적 가치만을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인물을 찾아볼까요?
가롯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옥함을 깨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지신의 장례를 준비한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참여한 사건, 거룩한 낭비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3백데나리온 옥함을 깨는 것은 낭비로 보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로마서 1:24~32절의 말씀처럼 내어버려두십니다.
갈아디아서 5:19~21절 말씀처럼 육신의 일을 하도록 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은 한 순간적이고 무질서합니다.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면서 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성령에 이끄심을 받느냐와 받지 않느냐로 구분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자로 구별됩니다.
3:1절에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아 십자가도의 도와 하나님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의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면 쉽게 세상으로 돌아가고, 잘되면 우쭐거립니다.
삶에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3:3절에 삶의 모습을 볼 때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입니다.
그들 중에는 다양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섬기기도 하는 다양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에서 시기하고 싸우는 것을 보니까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을 보니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4파 나뉘어 갈리지는 것을 보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착각을 합니다.
보통 우리들은 영적인 은사가 많으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예언을 하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구분에 따르면 영적인 은사가 많다고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누리지 못한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세상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종교생활을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주님과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떤 분일까요?
보통 영에 속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상을 보거나 방언,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자에 대한 설명이 2: 15~16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을, 사람을 바르게 봤습니다.
바울 자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령께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순종합니다.
그의 삶이 성령에 인도되는 사람입니다.
삶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표현은 성숙한 사람입니다.(고전 13:11절)
어린 아이와 같은 생각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셈과 야벳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처신을 하는 사람입니다.
시기와 분쟁의 현장에 뛰어 들어가서 화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영에 속한 공동체답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사건으로 계속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새 육신에 속한 공동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성령이 개입하시도록 열려 있을 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계속하여 살아 있을 때 그 교회는 영에 속한 공동체가 됩니다.
삶의 방식에 개입하고, 교회의 삶이 성령에 이끌려 계속하여 변화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영에 속한 공동체였습니다.
구제의 문제로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갈라졌습니다.
구제의 누락이 되었던 헬라파를 위해 헬라파 출신 7명의 집사를 뽑아 구제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구제시스템을 세웠습니다. 문제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말씀과 구제에서 균형 잡힌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공동체입니다.
영적인 일이 일어나야 교회가 바뀌는 것입니다.
날마다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는 것과 같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섬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적용)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삽시다.
고린도교회는 영적인 은사가 풍부한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많다보니까 스스로 높아져 있어서 복음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삶에는 시기와 분쟁이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거듭났으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인체하지만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따라가는데 예수님의 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육, 자랑하기 위해 예수님의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인도해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려고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나를 죄인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던 사람도 성령이 임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성령이 오시면 기도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집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라고 합니까?
구원의 사건을 보라고 합니다.
생명을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을 때 시기와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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