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6~2:5절
광고로 알려드린 대로 미얀마선교사님의 중고차 차량구입에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주님이 사도행전 20: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적으로 보면 말이 안됩니다.
빵과 같은 물질은 나눠주면 줄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고상한 가치는 나눠주면 커집니다.
위로, 사랑, 진실과 같은 가치는 나눠주면 커집니다.
우리가 나누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목적은 아닙니다.
주님이 생명을 주신 은혜라는 가치를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구하지 않은 것도 채워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신앙생활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끼리끼리 나뉘고 갈라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1년6개월 동안 말씀으로 세운 교회이어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는 무엇을 놓쳤기에 이렇게 갈라졌을까요?
첫째는 세례의 의미를 놓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십자자의 말씀, 십자가의 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세례와 십자가는 내가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지만 내가 죽지 않으니까 내가 나오고, 내가 나오니까 싸우고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다른 차원에서 고린도교회가 놓친 것을 접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준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준을 놓치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자랑하게 되고, 결국 갈라지고 나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준과 우리들이 기준삼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적용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6절에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보통 부르심(소명)이라는 말은 주로 사명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나를 목사로 부르신 것 같다, 나를 찬양사역자로 부르신 것 같다, 선교사로 부르신 것 같다.
부르심이 사역에만 국한 되지 않습니다.
1절의 부르심은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로 부르셨다는 직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절의 성도의 부르심을 받고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으로 구원을 가리킵니다.
9절의 너희를 불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26절도 9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루게 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실 때 사회적인 위치와 형편을 보셨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불러서 교회를 이루였느냐를 보라는 것입니다.
26~28절은 고린도교회의 사회적인 구성을 보여줍니다.
고린도교회에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이 좋은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지식인층이 별로 없었습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가문 좋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불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로 고린도교회는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미천한 것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26절에 육체에 따라, 27절에 세상의, 28절에 세상의가 기준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낮은 사회적인 신분에 속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것들로 취급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별 볼일 없는 것들을 불렀으니 감사하라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삼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회적인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를 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너희 모두는 더 이상 어리석고, 약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자랑할 것도 없고, 위축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로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자신을 자랑하게 하거나 열등감에 빠지게 합니다.
대부분 열등감을 갖게 됩니다.
전교 일등도 다른 학교 일등을 보면서 열등감을 갖습니다.
열등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주는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따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27~28절입니다.
미련한 것은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약한 것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들려고,
천한 것은 폐하려고, 무효화 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비천한 너희들을 사회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포장된 가문, 학벌, 가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의 지혜가, 교만한 사람의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삼아서 교회를 이루지 않습니다.
낮은 계급을 부르셔서, 겸손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시민이 되어 하늘 바라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형편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노아는 500세에 셈, 함, 야벳을 낳았습니다.
자식이 적은 것은 당시 사회에서 받았던 모멸감과 수치감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노아를 선택했습니다.
그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아들을 다 사무엘 앞에 오도록 했습니다.
막대아들인 다윗은 양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새의 기준에 다윗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붓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29절은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아무 육체라도=육체를 가진 인간 누구든=사회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존재감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알아주면 존재감이 커집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존재감이 줄어듭니다.
세상은 존재감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존재감을 묻어버립니다.
나도 누군가의 존재감을 묻어버리기도 합니다.
모두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사회적인 기준으로 부르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31절에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 교회에서 자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면 주님만 보입니다.
‘주님만을 자랑하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자신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서=너희와 함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외는 알지도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의 우선수위는 1번은 십자가입니다.
인간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인 십자가입니다.
한 가정을 회복시키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갈라지고 나뉜 것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끼리끼리 모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을 잃은 결과가 분쟁이었습니다.
적용)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갖고 삽시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강함이 되고, 어리석음은 지혜로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볼 때 진정한 감사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 용맹 부를 자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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