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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완성)

십자가를 생각하자

by ysong 2022. 11. 16.

고린도전서 1: 18~25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나뉘고 갈라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이 땅의 수많은 교회 안에서 나뉘고 갈라지고 끼리끼리 모이는 이유를 아십니까?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백 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뉘고 갈라진 이유를 아십니까?

지구상에 다양한 종파와 교단이 현존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가장 작은 규모의 가정교회조차 나뉘고 갈라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고린도교회에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까닭입니다.

 

고린도교회는 4개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얕잡아 봤습니다.

서로의 향한 미움과 감정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바울만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쪽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중에서 분쟁에 대한 문제를 1:10~4:20절까지 길게 다루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은 첫 번째 대안입니다.

교인이 4그룹으로 나뉜 이유는 세례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일부 지도자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세례를 잘못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세례를 잘못된 종교행위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례의 본질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도 세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세례는 세상과 단절을 의미합니다.

출애굽이 세례의 본질과 관통합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이 보면 이스라엘백성이 바다에 들어가서 죽었습니다.

가나안에 있는 사람이 보면, 이스라엘백성이 바다에서 살아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례는 애굽이라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 더 이상 애굽인 세성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아 가나안을 향한 순례의 길밖에 없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했을 때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분쟁한 이유는 세례의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적용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세례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본질을 자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싸움입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의 욕망, 시기, 질투와는 죽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분쟁을 해결해 주는 두 번째 권면의 내용입니다.

분쟁문제와 십자가와 연관성이 있는가?

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를 의지한 탓입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도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신을 만나러 가는데, 가는 길을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가?

신이 결정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길이며,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오라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이다.

적절한 예인지 모르지만 대통령을 만나기로 하면 대통령이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정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식이 되어 자식을 위해 죽었다면 대단한 뉴스가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죽으신 엄청난 굿 뉴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완동물을 사랑해도 내가 애완동물이 되어 애완동물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을 어떻게 볼까요?

멸망하는 자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미련한 것으로 봤습니다.

미련한(18, 20, 23)3번이나 나옵니다.

말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왜 말이 안된다고 할까요?

이사야 29:14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지혜, 명철, 총명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출처가 어디입니까?

죄인인 인간에게서 오는 것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똑똑해 졌다고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혼자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진 앞에서, 참사 앞에서, 죽음 앞에서 지혜와 지식이 무슨 필요합니까?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만 깨달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혜, 총명, 명철을 폐하신 결과입니다.

 

20~21절은 세상에는 두 지혜가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사람이 찾아낸 지혜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지식인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하는 헬라 철학자입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구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 말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까?

문자를 다루는 사람들, 문헌학자, 랍비, 전문가들이라고 자칭하는 선비들입니다.

유트뷰를 보면 전문가들 천지입니다.

변론가이며 토론가로사상을 주도하는 학자들입니다.

이성으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자, 언변에 능한 자입니다.

 

이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을 더 어리석게 할 뿐입니다.

그들의 논리가 구원, 사랑,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십자가의 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는가요?

교인들도 당시 유행했던 유대교의 율법을 통한 수행,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은 미련한 것을 선포하고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내용이 자체가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장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왜 무능하게 보이는가?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체험신앙 중요합니다.

거듭거듭 체험만 구하면 문제가 됩니다.

표적 자체를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표적 자체를 믿는 분들이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눈에 보이면 쫓아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적에도 만족하지 않고 매일 기적을 쫓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적의 의미는 표적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면 끝입니다.

관계가 형성되면 보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게다가 율법을 중요시하는 유대인에게 신명기 21: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으로 인해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이고 그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헬라인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이성,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신봉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혜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십자가는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사형수 형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실패와 죽음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비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로 반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순으로 들리기 때문에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이라고 자처하신 분들이 나는 무신론자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시대는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을 줄까요?

아닙니다.

마음의 편안을 위한 각종 수행이 유행합니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강조합니다.

이런 시대에 십자가는 어떻게 비칠까요?

미련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의 원리와 상반됩니다.

내 노력으로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신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충만합니다.

25절에 하나님은 약해지거나 미련해지지 않는데, 하나님의 가장 미련한 것이 약하신 것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분쟁의 이유는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진정한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던 그 방식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진정한 표적입니다.

 

적용)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우리 주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의 자리를 기대했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을 기대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 고난이나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죽음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밀알입니다.

 

너희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십자가의 도를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습니다.

죽었는데 세상의 것들로 인해 다투고 분쟁하고 싸울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유일한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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