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3:1~9절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지금도 90세를 산다면 장수했다고 하는데 사도요한은 AD100년까지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인간으로 깊은 영적인 세계를 체험한 사도요한이 강조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도요한은 식상할 정도로 사랑만을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사랑이 신앙의 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배웠으면 합니다.
제가 인생을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일찍 배웠으면 후회할 일을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둠에 있지 않아서 덜 미워하면서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수요예배에 나오시는 권사님이 최근에 몸이 불편하여 한 달여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습니다.
병상에서 회개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병상에서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전에도 미안하다고 했는데, 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편지를 받은 아들은 엄마가 병상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으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끝자락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이 사랑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덕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고,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요한은 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표현인데 바울은 로마서 8:14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사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자녀로 표현하고, 바울은 입양이 된 자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자녀인 것은 사실인데, 표현상 느낌은 조금 다릅니다.
그만큼 사도요한이 친근감 있게 표현한 것은 날마다 사귐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이고 특권입니까?
재벌의 자녀이면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실감하십니까?
피부에 와 닿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대단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대단한 축복이고 특권이라고 하는데,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따르지 않았던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업신여기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우리 스스로 조차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실감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걸어 본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나타낼 때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실교회가 50주년 기념으로 선교대회를 하는 바람에 덩달아 함께 사역하다가 선교사로 나가신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현지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그 나라들이 인정하지 하든지 않든지 관계없이 나눔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선교사라는 사명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물건을 살 때, 직장에서 일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분이 누구인지를 알면 가치 없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욕망의 노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사도요한은 평생 주님을 닮기를 원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엄청난 영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2절은 변화산에 겪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순식간에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습니다.(마 17:1~3절)
일생동안 각인되어서 삶의 목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삶의 종착지가 어떤 삶인지 보았습니다.
이 영적인 체험은 사도요한에게 변함없이 길을 걷도록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본 것이 분명하고, 음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처럼 되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도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미래에 그와 같을 될 것이다.
영화의 상태=예수를 닮는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만이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한 것처럼 나도 깨끗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면 안된다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예수님을 닮는 다는 것은 구원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영화를 가리킵니다.
그의 영화스러운 모습처럼 우리도 영화스럽게 될 것입니다.
2) 현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양식을 본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3년 동안 보여주셨던 삶의 여러 가지 태도들입니다.
가령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가난한 도아주고, 죄인 용서하셨던 우리도 실천하셨는데, 그와 같은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3) 미래에는 삶의 양식을 본받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와 같이 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을 가리킴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노력으로 그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이끌려 가고, 마지막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력으로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5) 그와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아무렇게 살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죄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뿐만 아니라 바울도 죄와 씨름했습니다.
바울은 죄에 끌랴가는 자신의 실상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4절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한다고 정의했습니다.
죄는 불법이라고 합니다.
죄는 과녁을 벗어난 것, 하나님을 목표로 삼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목표를 삼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서 불법은 불법자가 아니라 법이 없다는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율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맘대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가 목표이고, 자기가 기준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6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죄는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에서 옵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갖고 있기에 죄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죄는 복원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익숙한 것에 머물려고 합니다.
익숙한 생각, 가치관, 행동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어둠에 잠시라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전에 재미있었는데 이젠 마음이 없어져서 싫어집니다.
예전에 저는 술과 담배를 피웠습니다.
술을 먹으면서 밤새도록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진솔한 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까 그것이 의미 없고 싫어졌습니다.
지금은 커피 한잔을 하면서 진솔하고 은혜로운 대화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둠이 찾아오면 2:16절을 생각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세상에 빠지지 말자“고 고백합니다.
옆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더라도 의지를 갖고 믿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은 육신보다 더 강한 분이십니다.
성령의 법에 거하길 힘쓰면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죄가 어디서 오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죄는 마귀에게서 옵니다.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등지게 합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은밀한 죄, 습관적인 죄, 가족과 나만 알고 있는 죄뿐만 아닙니다.
나쁜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부끄러운 생각을 갖고 있으면 마귀가 속 들어갑니다.
마귀가 가룟유다에 들어가 나쁜 생각을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9절에 복음은 죄를 짓지 않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과 다릅니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 어기면 벌이 따릅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해 주겠다는 것은 죄로 넘어질 때 함께 아파하고 일으켜 세워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를 안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역사가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씨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기도, 말씀을 깨닫게 한 대로 살면 자라게 됩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됩니다.
적용) 가인 같이 속지 말자
가인은 아벨의 의로움이 싫었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정직함, 올곧음을 싫어합니다.
사도요한은 형제들이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의 미움은 오늘날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내는 것을 기뻐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죄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인생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삶의 가치와 목표와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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