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1서 1:1~10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야고보서를 통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참 소망을 배웠습니다. 이제 한 가지 남았는데 사랑입니다. 요한123서를 통해 영원한 사랑을 배우고자 합니다. 배워서 익혀서 체질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신앙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제도 사랑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조금 일찍 사랑을 알고 시작했으면 하는 후회의 마음도 듭니다.
사랑을 배우고 익히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자기헌신, 자기희생, 자기 겸손, 자기 절제, 인내, 용기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이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사랑을 배워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사랑을 배워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많은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55~60년이 지난 ad 85~90년에 요한복음을, 5년 후에 요한123서를, 5년 뒤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어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랐을 때 20초반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의 별명은 우레의 자식이었습니다.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적이었기 붙여진 별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지내면서 바뀌었습니다.
요한복음 13:23절에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2절에서도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수종자처럼 늘 가까이 붙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밤늦게 찾아온 니고데모를 만난 사건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께 밀착되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라는 별칭을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사도요한이 들려주는 사랑을 배우려고 합니다.
노 사도가 들려주는 사랑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5, 60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다 떠났습니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대부분 1세대 성도들은 떠났습니다.
2, 3세대들에게는 뜨거운 열정이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교제가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쁨을 맛 볼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 생명의 고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박해가 아니라 유혹으로 점점 교회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보다 세상이 좋아 보이는 유혹에 넘어가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다시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 누리는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편지인데 인사말도 없이 바로 예수님께 향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자신의 신앙경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강렬합니다.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지 바라고 표현합니다.
직접 경험하고 함께 있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듣고, 보고, 만졌다는 표현처럼 확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서에서 징계했던 이단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영지주의가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영은 거룩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남다른 지식, 영적인 지식, 신비한 지식이 있어야 구원을 이루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어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이런 교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사귐과 기쁨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며,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앎으로 시작됩니다.
아는 사람 사이의 다툼은 서로 알기 때문에 다툼도 길어지고 그 상처도 오래갑니다.
알기는 알되 섣부른 앎, 피상적인 앎, 주관적인 앎이야말로 인간 다툼의 필연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확신하고 정확히 알고 있는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볼 수 있듯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이유는 사귐이 잇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은 평생 동안 예수님과 사귐으로 기쁨을 누려왔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생명을 보았고, 그 생명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귐과 누림으로 사랑을 이루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신과 교제를 말하는가요?
어떤 종교가 신이 인간을 친구로 인정하고 있는가요?
사귀었기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인 것입니다.
교회로 모였다는 것이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귐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2가지의 태도가 있습니다.
5~7절에서 빛 가운데 있을 때 사귐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은 막힘이 없고 담이 없습니다.
어둠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고,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주님과의 사귐은 앞뒤가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의 성도간의 사귐도 동일합니다.
교회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고 기쁨과 충만을 느낄 수 있을 때 사귐이 이뤄집니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저도 단점이 많아서 그런 생각들을 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비쳐질까를 생각하면 진심이 통하는 사귐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정죄와 지적과 비판을 염려한다면 올바른 사귐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귐에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수직적인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귐으로 이웃과의 사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8~10절입니다.
날마다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자백(그대로 말하다)의 차이가 있습니다.
회개는 돌이키다,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거꾸로 살던 인생이 복음을 듣고 죄를 용서받고, 자녀 삼아주심을 듣고,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회심으로도 쓰입니다.
마음과 행동의 돌이키는 것이고, 인생의 한 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향하여 가다가 옆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옆으로 가는 것을 날마다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은 그대로 말하다, 내가 행했던 우리의 죄를 그대로 다 말한다.
너의 잘못을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라고 말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래도 말하는 것입니다.
잘나가던 야구선수들이 일순간에 추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승부조작에 빠진 경우입니다.
첫 타자에게 볼을 던져라와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올무가 되어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한 번 실수했다고 곧바로 자백하면 될 텐데, 결국 인생을 망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사하시며(회개), 깨끗하게 하심(자백)하십니다.
용서의 확신의 근거의 말씀입니다.
깨끗하게 하심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히는 것입니다.
또 넘어 졌니 갈아입힙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싸워하는 시간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대로 얘기만 하면 용서할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하십니다.
주님과 사귐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날마다 잘못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귐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적용) 친밀한 사귐이 있는가?
사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를 쓰고 있습니다.
나눔과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귐에는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가 오면 두개를 나누어줘야 합니다.
손이 인색하면 나눔이 풍성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사귐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제하는 것입니다.
인격은 관계 속에서 자라갑니다.
사귐의 목적은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는 어떤 훈련을 받았는가, 몇 년의 신앙경력이 아니라 사귐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귐에는 진심이 통해야 합니다.
진심이 통하는 사귐을 지속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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