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베드로전서(완성)

그리스도인의 직장 생활

by ysong 2022. 3. 21.

베드로전서 2:18~25

베드로가 신앙적으로 어떻게 성숙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됩니다.

특히 칼로 대적했던 베드로가 국가의 제도와 왕과 총독에게 순종하고 존대하라고 한 부분입니다. 이는 자신의 감정보다, 신념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한 세계관의 변화로 보입니다. 이런 작은 부분에서 베드로의 신앙의 성숙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어려움을 겪거나 격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록 힘들었지만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소식도 듣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원리를 잘 배워서 각자 적용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로마사회는 고용된 노예든 종신 노예든 이들로 지탱되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종의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전문직의 기술을 갖고 있지만 포로로 끌려와 종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점차 복음이 전해지면서 노예들도 예수 믿고, 적지만 주인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사회에서 작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회에서 주 안에서 주인과 종의 구별이 없다고 배우게 됩니다.

일부 종의 신분을 가진 성도 중에는 주인이 예수 믿으니까 나에게 나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악용하는 이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같은 형제, 자매이기에 주인이지만 나에게 잘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부 종들은 일을 하는데 소홀히 하기까지 했습니다.

 

사환이 등장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서 사환의 신분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과 자유인의 중간단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이케타이-가족의 일원으로 종속된 가정의 하인들을 의미합니다.

둘로스-노예와는 다른 신분을 가리킵니다.

고용된 종입니다.

오늘날에는 직장인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동일하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종의 제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묵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도 골로새서 3:22~23절을 통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보는 듯이 하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1~2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잘 섬기라고 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사도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을까요?

철저하게 순복하라고 했을까요?

거부하고 잘못되었다고 항의하고 시위하고 투쟁하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노예제도가 악습임을 인정하면서 이들은 제도폐지를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로마 역사를 보면 노예반란이나 폭동이 있을 때 노예 성도들이 주동자로 몰려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는 사례도 있긴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조차도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사도조차도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훗날에야 노예제도가 잘못됐다고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운동을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경은 빌레몬서입니다.

1863년에 미국에서 노예해방선어 발표됩니다.

제가 어릴 때 머슴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남의 신모로 들어가서 집안일을 돌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요?

하나님이 제도를 인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는데 가만히 계실까요?

노예인 성도들은 왜 가만히 계시내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 속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은 여건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개혁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순종하라고 합니다.

 

19절에서는 하나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라고 합니다.

이쯤되면 이 말씀을 적용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19절에 부당하게(억울하게) 벌을 받아도 참으라고 합니다.

불공평하게 벌을 주는 주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참으라고 합니다.

 

20절에 종이 잘못을 했습니다.

잘못으로 인해 주인에게 매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잘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고 합니다.

 

종은 예수를 믿는데 주인은 안믿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비관용적이고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참으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했는데도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은혜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 은혜를 생각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고난은 내 것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존재로 빚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성숙은 스스로 고난의 자리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미성숙은 고난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권리 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적용하여 승리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21절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행을 했는데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22절에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분은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거짓도 없고(예수님의 무죄성),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죄가 없이 태어난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이런 부당함을 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23절의 말씀처럼 대항하지 않았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24절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나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5절에 우리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목자이고 감독이시며 영혼을 살펴보는 분이며 양을 돌봐주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내신 삶입니다.

순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오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관찰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적용) 오늘 말씀을 두 측면에서 적용하고 싶습니다.

일터에서 부당하게 취급당할 때 이것은 은혜입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은혜가 아니라 불행이 아닌가요?

억울한 고난이 은혜가 될 수 있을까요?

21절이 대답입니다.

그 길을 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터에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로 승리하는 일터가 되길 바랍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불의에 대해서 대항하지 않아야 되는가?

부당하게 나를 핍박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참아야만 하는가요?

정당하게 반응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고소파, 반고소파가 있었습니다.

형제간의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 반고소파가 있었습니다.

반고소파가 신앙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꼭 신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마련된 사회시스템을 이용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하는게 좋지만 안될때는 법절차를 밟는 것도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안될 때는 세상의 법정으로 가서 해결하는 것도 정당합니다.

 

당해야 할 때도 있지만 안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정당하게 반응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하게 당하실 때 대항하면 안 된다는 기본 전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을 때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확신을 줄 때 당하지만 정당한 대응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이 소망이 되는 비결  (0) 2022.04.04
하나님께 소망 둔 부부  (0) 2022.03.28
국가와 제도에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0) 2022.03.07
나는 누구인가?  (0) 2022.02.28
잠깐 근심  (0) 2022.02.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