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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완성)

국가와 제도에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by ysong 2022. 3. 7.

베드로전서 2:11~17

기독교인은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지만 소망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지난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전서 2:9절과 출애굽기 19:5~6절을 통해 정체성과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큰 은혜를 받은 말씀 중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구나!

나는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구나!

나는 세상과 구별된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하는구나!

나는 하나님께 소속된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을 질 것이니까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이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나그네, 거류민이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나그네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인생을 낭비하며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라고 하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삶의 수준은 대단히 높습니다. 베드로사도는 국가와 제도에 대해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주가 대통령 선거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면 소망을 잃지 않는 성도에게 요구하는 세 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자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국가와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요구는 자신에 대해서인데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죄악된 욕망을 육체의 정욕이라고 합니다.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병들지 않게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빠와 아이가 마트에 갔습니다.

아이가 떼를 쓰고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부드럽게 불렀습니다.

영락아 하지마라, 영락아 하지마라고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습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유심히 처다 본 어떤 사람이 아빠가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이 영락이냐고 묻습니다.

아빠가 대답을 합니다.

그 이름은 제 이름입니다.

자신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요즘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혼을 드리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총리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흠 없이 살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니엘이 기득권에 안주하고 누리려고 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다니엘을 제거하고 싶었던 정적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매일 3번씩 기도하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긍정적인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로 악행하고 비방하는 자들이 선한 일을 보도록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행실을 선하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합니다.

 

어디서 이렇게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중에서입니다.

더 나아가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 속에서입니다.

삶의 현장 한 가운데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류대로 흘러가면 쉬운데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9절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행실을 선하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틈에서 선한 행동을 행하라고 합니다.

 

선행을 힘쓰는 이유는 이방인 중에 악행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을 했는데 피를 마시고, 살인하는 사교집단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잘못된 공동체라고 비방했습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라도 선행을 힘쓰라고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비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난이 분명히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 할 수 있도록 훌륭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선행에 힘쓰면 알 게 될 것입니다.

최후 심판에 날에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젊은 베드로, 예수님과 제자이었던 베드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베드로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고, 행실을 선하게 하라고 합니다. 참 많이 성숙하고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까 저와 비슷하거나 4~5살 많을 겁니다. 신앙적으로 많이 깊어진 베드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서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왕이나 국가의 제도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들어 대항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온 무리들은 칼과 뭉치로 무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 중 대제사장에 소속된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들어 대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고 하면서 종의 귀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깊게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의 모든 제도와 왕과 총독에게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바울도 로마서 13:1~7절에서 베드로와 비슷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국가와 국가 위정자에 대한 교훈이 같다는 것입니다.

두 분이 만나서 서로 의견을 나누거나 토론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성령께서 두 분에게 깨닫게 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고, 위정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안 믿어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합니다.

 

당시 상황은 로마황제가 교회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썼다면 조심하라고 했을 겁니다.

당시 왕이나 총독은 정치적인 이익에 따라 재판도 굽게 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13, 14에 총독을 존경하라, 왕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1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왕을 존경하는 것을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왕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조직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조직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데 조직이 필요한데 국가가 그 속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중요한 세 조직이 있습니다.

가정, 교회, 국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조직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조직체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제도와 왕이나 총독의 역할은 권선징악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데 위정자들은 공의를 시행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다윗이 자기 통치를 자평하는 것이 나옵니다.

왕의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23:3절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통치 원리를 말하면서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정자의 역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69조에 따른 대통령 취임선서의 내용입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성경에서 권하는 권선징악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복리와 증진하는 일입니다.

악한 정부라도 정당한 요구를 할 때는 순응하고 부당한 요구를 할 경우 신앙의 양심에 따라서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살아라(16~17).

복음을 받아들여서 자유하게 되었는데, 그 자유를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 악한 생각과 행동을 하면 이기지 못합니다.

 

부당한 권력에 어떻게 순복할 수 있습니까?

부당하게 맞서다가 부당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복음은 권력이 될 수 없습니다.

권력에 맞설 때 비권력적인 방법으로, 폭력에 맞설 때 비폭력으로, 교회가 권력에 따라 움직이면 잡동사니가 되는 것입니다.

국가제도와 왕에 순종하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뭇 사람과 왕을 같은 위치에 놓고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선택적 정의와 공의는 공의가 아닙니다.

똑같아야 합니다.

 

적용)세상의 제도나 국가의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부 교인들은 국가와 사회의 제도와 상관이 없지 예수만 질 믿으면 됐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제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연하게 거슬릴 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세계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건전하게 비판하고 선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권위에 복종하라고 한 말씀을 오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권력에 붙어서 성경이라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익과 힘이 있는 곳에 서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주류는 노예와 하층민들이었습니다.

권위에 순복하라고 한 까닭은 모든 권위가 하나님으로 비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이 왕권신수설입니다. 모든 권위가 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중세 때 왕권신수설이 오늘의 말씀을 오용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대제사장에게 고난당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자처럼 순종했습니다.

두려워서 인정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순응은 패배가 아니라 영광의 길입니다.

권력에 따라가기 위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순응하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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