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3~12절
베드로서는 AD 64년 전후에 쓰여졌습니다.
베드로서는 소망의 책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베드로서가 쓴 시기를 보면 소망과 전혀 무관합니다.
역사적으로 베드로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네로황제이기 때문입니다.
네로황제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네로황제의 박해 때 순교 당하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쓸 때, 베드로는 임박한 핍박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소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상황에서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산 소망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가요?
우리는 베드로시대와 달리 박해를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더 심각한 사탄의 유혹이 있지만 일부 성도들만 피부로 느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전하는 산 소망이 유효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망의 근거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소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소망은 근거와 대상이 막연합니다.
새해에 일출을 보면 소원을 비는 것이나, 간혹 스포츠선수들이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긍정의 힘과 같은 것입니다. 선수들이 메달을 따기를 바라는 것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기를 바라는 것도, 취업, 학업, 사업의 성공을 바라는 소망도 근거가 막연합니다. 흔들리는 사람이나 조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거가 변하기 때문에 숱한 배신과 억울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살아있는 소망은 구원입니다.
베드로가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배신자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좌절하고 낙담한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주신 구원이 소망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산 소망을 있게 해서 활력 있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소망으로 인해 그토록 힘든 환경과 핍박과 고난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소망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참 평안과 안전과 평강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 4절입니다.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소망입니다.
변함이 없는 영원한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이런 것은 없습니다.
땅의 것은 변하고 변질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산 소망은 영원한 유업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를 알기 때문에 다르게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근심거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근심과 걱정거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오해를 합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게 됩니다.
욥처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고난을 주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혹시 실수로 찾아온 고난이라면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것들입니다.
6절을 보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으로 인해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 시험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흩어진 나그네들도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
잠깐 근심이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코로나로 인해 잠깐 근심거리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님들의 손길과 기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큰 기쁨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선지자, 사도를 통해 분명히 계시해 준 것입니다.
10절에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미래를 알려주면 듣고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1절에 선지자들의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바르게 상고했다=연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선지자들과의 역할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기계적영감설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타이프라이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기계적인 역할만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유기적영감설은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기록하도록 했는데 성령께서 오류가 없도록 하셨다는 견해입니다.
정통적으로 유기적유감설을 지지합니다.
코란은 마호메트가 동굴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아 섰다고 하기 때문에 기계적영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격고 있는 각종 일에 대해서 이유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환상이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혹시 아무것도 모르겠다면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무지하고 무능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또 어떤 때는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원리를 줬으니까 잘 적용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살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소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보호하신으로 인해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원이 주는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시련을 기쁨으로 바꿉니다.
구원은 시련을 영광으로 바꿉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이 소망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환경과 고난에 위축되지 않고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13~24절의 말씀입니다.
13절-허리를 동이고 근심합니다.
중요한 시합을 남겨둔 선수와 같이 절제한다는 것입니다.
15절-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합니다.
18절-헛된 행실을 버립니다.
행실은 지속되는 행동의 경향을 의미합니다.
라이프스타일입니다. 생활방식입니다.(아나스트로레페)
구원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따라오는 변화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산 소망은 우리들의 현실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요?
저는 이 소망으로 삽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을 선택하고, 사업을 하는 목적으로 나타납니다.
적용) 오늘 말씀에서 적용하고 싶은 것은 습관이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성품이 바뀌기 전에 습관화 된 행동이 중요합니다.
거룩이 습관이 되면 사람이 바뀝니다.
모국어가 중요하다, 집안의 언어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라이프스타일입니다.
대기업의 갑질의 가정을 보면 엄마와 아빠와 자식들이 차이가 없습니다.
익숙하고 자주하는 행동이 소망과 어긋난다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사를 다니는 나그네입니다.
이사를 다니면 버리게 됩니다.
익숙하지만 헛된 행실을 버리며 사는 것으로 산 소망이 현실에 나타나나길 바랍니다.
'베드로전서(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께 소망 둔 부부 (0) | 2022.03.28 |
---|---|
그리스도인의 직장 생활 (0) | 2022.03.21 |
국가와 제도에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0) | 2022.03.07 |
나는 누구인가? (0) | 2022.02.28 |
흩어진 나그네에게 (0) | 2022.02.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