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16~21절
운동선수가 슬럼프가 찾아오면 가장 기본적인 자세부터 교정하고 다시 시작한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신앙의 슬럼프를 맞이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시간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러서-회개케 하시고-새롭게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치 안드레가 메시야를 만났고(유레카) 새로운 삶을 출발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해보입니다.
최근 교회 안에서 복음의 감격보다는 거짓, 불의, 갈등이 심각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이해 때문이라고 봅니다.
오늘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인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16절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명제입니다.
방법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면 이 세상에 구원 못 받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구원의 통로입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여기에 타종교와 기독교의 구원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종교는 구원을 이루는데 인간의 수행과 자기부정의 과정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구원의 출발이 자신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시작, 중간, 끝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과 함께 진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왜 은혜인가요? 값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선물은 돈 주고 살 수 없고,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도 차이가 있습니다.
타 종교는 생사고락을 초월해 마음의 절대 평안과 행복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개인의 평안과 행복은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선물로 얻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 구원은 구속과 구원을 포함합니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구속은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구속의 구약적 의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고향은 어디요?라고 물으면 아브라함은 “저는 원래 갈대아 우르 땅에서 살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가나안 사람들은 “당신은 강 건너 여기까지 온 사람이군요, 히브리인이군요”라고 했을 겁니다. 구약에서 구속받았다는 것은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건너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홍해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의 신약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약에서는 구속받았는지의 여부가 그리스도 밖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나눕니다. 에베소서 2:12~13절-12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구속을 포함한 성화, 영화의 전 과정입니다.
1)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며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절에서 의-왕, 진리-선지자, 거룩-제사장(메시야 3중직)이 타락으로 기능상실 됐는데 회복됨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바름, 올바른 생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참지식, 하나님에 관한 참지식 획득,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제사장은 구별, 구별된 삶, 삶의 방식이 차별, 동기와 목표가 다르게 됩니다.
도덕성, 사회성, 창의력은 타락했지만 존속된 영역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위해 목회했는가?
갈라디아서 4:19절, 요한일서 3:2~3절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아(성령이 속에서) 신앙고백을 가능케 함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내 영혼에 은혜를 초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실 때 영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 이 영혼은 생명의 씨앗처럼 발아하여 점점 자라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훼손할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영혼이 죄악에 공격받아 금이 가고, 갈라지고, 찢기고 파괴되어 제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이 상태가 되면 사람이 하나님과 만남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도 영혼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죄의 층이 견고한 블록처럼 가로막고 있기에 불가능하게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겸손은 순수한 영적태도입니다. 겸손히 엎드리면 그때가 바로 영혼을 포위한 죄의 층에 은혜가 햇살같이 밀려들어 오면 이 견고한 죄의 층에 균열이 일어나고 서서히 파괴되어 마침내 내 죄의 층에 질식되어 있던 영혼이 새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성령께서 들어오심으로 새로운 자아가 역동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소욕이 일어난 인간은 하나님과 그 분의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옛 자아와 새 자아가 서로 갈등하고 다둡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성숙해 가면서 새 자아가 점점 옛 자아를 정복해 갑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하신 것은 성령 안에 있는 새 자아가 아니라 옛 자아를 부인하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일상에서 나타는 현상은 새로운 인식능력이 생김니다(로마서 12:2).
진리를 진리로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은 분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분별하면서 살게 됩니다.
인생의 질곡과 문제를 하나님의 관계에서 풀고, 해석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꿈을 자주 꾸는 분이 이상한 꿈을 꾸었을 경우에도 그 꿈의 해석을 자신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수가 없어서, 운이 좋아서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관계로 해석하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낳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존재와 인격과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구도자는 진리를 얻기 위해 찾아가는 자입니다.
구복자는 복을 얻기 위해 찾아가는 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성숙은 점진적으로 되고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과 성숙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구속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단번에 이뤄진 사건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성취된 의가 나에게 전가 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믿음은 통로입니다.
구원은 구속받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전 과정입니다.
칭의 없이 성화 없고, 동시에 성화 없이 칭의가 없습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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