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1~13절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 진지한 고민하고, 더불어 실천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믿음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인내와 소망을 낳는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를 위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자리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니까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유무가 여기서 많이 갈라지더라구요.
믿음이 있는 분들은 힘들면 더 하나님께 바짝 다가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위로와 확신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의 내용입니다.
이젠 2장으로 넘어갑니다.
오늘 말씀은 행함이 있는 믿음과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가 어떻게 죄로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 차별을 당해 본적 있습니까?
엄청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별을 당하기도 하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차별은 우리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너무 일상화 되어서 차별에 대해 의식하기도 하고 의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2천 년 전에도 이런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누가 차별하고 있는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영광의 주에 대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여기서 영광의 주는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의 죽음과 사망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막힌 담을 허시고, 차별을 없애고, 창조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죽으시고 사망권세를 깨치고 승리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졌다면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차별한다면 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차별하기 때문이고 또한 차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힘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행동하면 차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명령을 의식하면서 살 때 차별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차별이 있어나요?
회당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린 장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차별을 받으면 어려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로마와 세성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들끼리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는데 자기들끼리 차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이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속에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도 목사의 세계에서 교회의 크기로, 개척교회 목사라는 이유로 차별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교회의 크기는 거룩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차별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목사의 세계도 그런데 교회 안에서 차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왜 교회 안에서 이런 차별이 있게 되었을까요?
야고보사도는 실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뤘습니다.
빈부차별이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는 좋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반면 가난한 자는 가든지 말든지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빈부에 따라 대우하는 것이 달라지는 이유가 뭘까요?
금가락지 옷은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세상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하면 차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관점을 갖고 구별을 해야지 세상적인 관점과 생각을 가지고 구분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기는 공동체에서 빈부에 따라 섬기는 것은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4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을 근거로 차별을 합니다.
자기가 판단의 직책을 가진 것처럼 판단하는 일을 합니다.
이 결과는 차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장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판다하실 분은 한 분입니다.
판단을 계속한다면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차별이 죄인 까닭입니다.
9절에 결국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차별입니다.
차별하기 전에 이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별은 악한 생각의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새벽기도 시간에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과 연결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단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단코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단코 차별하지 않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차별의 문제를 이웃사랑과 결부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율법을 어긴 것이다.
차별받지 않는 것이 사랑을 느끼는 것이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빈부와 기질 때문에 차별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3절에 성도가 차별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성도는 긍휼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1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베풀면서 사는 것입니다.
적용) 나는 차별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차별을 받고 있는가?
삶 전체가 차별과 싸움이기도 합니다.
남녀, 직업, 외모, 지역, 인종에 따라 차별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굉장히 합니다.
동남아사람은 외국인노동자로, 흑인은 흑형으로 차별합니다.
백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대주의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우리의 피부를 살색이라고 합니다.
검은 색은 살색이 아닌가요?
인간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차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했던 실수들입니다.
이삭도 미숙할 때 에서와 야곱을 차별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보다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다윗도 자식들 차별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물의 여물통에 오셨습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목사가 되어 없어보니까 차별에 대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배우고 못 배우고, 부자이고 가난한 것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기준은 신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신앙의 실력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자체로 평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차별하지 않는 우리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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