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 9~18절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원 받은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제를 다루는데 시험이 등장합니다.
여러 기지 시험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세 단어를 묵상하자고 했습니다.
인내, 지혜, 기도입니다.
저는 지난주 말씀을 전한 후 시험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는 것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시험이 해결됐기 때문에 찾아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시험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시험을 당하는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하면 이전보다 조금 더 절제하고, 경건하게 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겪는 시험의 종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게 네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의 실력을 점검하는 테스트, 사람이 욕심에 이끌려 시련을 당하는 템프테이션,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는 크로스, 스스로 행하는 시험으로 의심이 있습니다. 4종류의 시험이 섞여서 자신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분별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시험은 어떤 종류에 해당됩니까? 또 앞으로 겪을 시험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까요? 또 시험의 때에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이런 신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겪는 시험은 어떤 종류일까요?
2~8절의 시험, 13~15절의 시험이 기록되었는데, 중간에 부가 끼어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과 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시련 가운데 재물의 손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 속에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같은 민족끼리 결속이 강한 나라가 있습니다.
유대인, 중국, 한국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건너간 자리를 잡은 나라 중에 중국인들인 차이나타운을, 한국인들을 코리안타운을, 타운을 형성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사업을 자기들 끼리 합니다.
반면 재팬타운은 없는데, 일본인들인 미국인들 속에 들어가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유대교들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를 신앙적인 배신자로 취급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경제적인 관계를 끊으니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심하게 부의 손실이 온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으로 인해 시험을 당하는 이들에게 부에 대한 재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재물은 들의 풀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부가 결국 도움이 안된다, 재물은 일정함이 없다, 부는 왔다고 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라고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낮은 형제는 가난한 자,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높음은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2:5절입니다.
믿음을 부요케 하는 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을 자랑합니다.
나의 가난이, 나의 부족이 나를 떨어지게 하지 못함을 자랑합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죄를 지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합니다.
낮아짐은 돈, 세상의 가치를 말합니다.
명예, 지위를 자랑합니다.
그것을 자랑하고 살았는데 들의 풀과 같이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기준이 아니라 영적인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지혜이지 정함이 없는 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재물이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시험에 빠지도록 하는 주요한 주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을 견디자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아담에게 시험문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시작은 테스트로 시작됐지만 실패한 아담과 하와는 핑계를 댑니다.
하와는 뱀에게,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여자에게 핑계를 댑니다. 대고 하나님께 돌립니다. 답은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견디어 내는, 이겨내는 동기가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시험을 이겨내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을 만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고통을 주느냐?
하나님은 우리들이 유혹에 빠지도록 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유혹이라는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욕심, 욕망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빠져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시험이 테스트로 가느냐, 유혹으로 가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집니다.
엘리사와 나아만 장군, 게하시의 행동은 테스트와 템프테이션의 경계선을 알려줍니다.
엘리사의 사환이며 수제자 게하시의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세운 선지학교의 책임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람의 군대장관(지금의 시리아)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고민하던 중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종의 말을 듣고 병을 엘라사를 만나러 갑니다.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에게 옵니다.
엘리사는 내다보지 않고 요단강에 들어갔다고 가겠다고 합니다.
나아만이 기분이 나빠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부하들이 나아만장군에게 감정적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좋다 해 본다, 안되면 너 죽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6번까지 변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테스트입니다.
점차적으로 깨끗해 졌다면 쉬었을 겁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7번째 깨끗해집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1차 테스트를 마치고 아람의 림몬신보다 여호와의 신아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만 장군은 고마워서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한 푼도 받지 않습니다.
엘리사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안 받았을까요?
엘리사는 재물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예물을 거절하는 엘리사를 보고 엘리사가 섬기는 신이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호와를 믿어야겠다고 합니다.
나아만은 테스트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를 지켜본 게하시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게하시는 돌아가는 나아만 장군의 일생을 쫓아가서 예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자기 집에다 갔다 놓고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게하시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유혹을 받게 됩니다.
유혹에 빠지면 회개하면 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됩니다.
게하시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섞여 있습니다.
테스트는 성숙으로 가고, 강하게 됩니다.
템프테이션은 어떻게 될까요?
14~15절입니다.
욕심-잉태-죄-사망으로 이르게 됩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혹입니다.
유혹은 낚시 바늘과 같습니다.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알면서 물게 됩니다.
내 안에 잘못된 욕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인간이 가는 경로와 일치합니다.
내 욕심이 시험을 받아 죄를 짓습니다.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악한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를 구하지 않고 욕심에 이끌려 살면 이렇게 됩니다.
욕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욕심을 없애기보다는 죄를 없애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야겠다,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정상적인 욕심은 괜찮습니다.
죄악 된 욕심을 거룩한 욕심, 정상적인 욕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구하는 것이 지혜일까요?
17~18절입니다.
악순환을 끊고 선순환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버지께로 내려오는 온전한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온전한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빛들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아버지로써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신약의 큰 변화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친근한 관계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가?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신실한 성품,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피조물의 특징입니다.
창조한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무엇이든 선합니다.
왜 이 이야기가 나왔는가?
13절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이 유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날 유혹하는 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원망하죠?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들을 유혹에 빠뜨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한 찬송의 주제입니다.
대신 진리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은 복음입니다.
복음이 인생의 내부에 들어올 때 그 인생은 마치 새로 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첫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에 찬 예물로 바쳐졌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은 수확한 첫 열매가 하나님의 소유인 것과 같습니다.
복음의 진리에 의하여 인생을 재창조하는 일이며 그것에 의하여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적용) 고통이 선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돌본 의사 선교사님이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 말입니다.
나병환자는 신체의 상처에 고통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현재 겪고 있는 각자의 고난이라는 고통은 선물입니다.
고전 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그런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받는다 할지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피할 길을 주셔서 감당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적인 욕심과 탐심을 죽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욕심을 제어하는 방법은 수행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믿음으로 극복해 나갈 때 욕심이 제어됩니다.
하나님이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선한 뜻을 갖고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이 따로 있습니다.
아브라함, 욥, 다윗, 사울, 목사, 장로, 집사의 시험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동일하게 인내하는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을 제거해 주시고 성숙하게 됩니다.
겸손, 인내, 돌아보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고난은 참고 견디고, 유혹은 물리치면 됩니다.
니 욕심을 봐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보호하신다는 지키시는 체험이 있기에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욕심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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