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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완성)

보여 지는 믿음

by ysong 2021. 12. 12.

야고보서 2:14~26

야고보서는 믿음의 현주소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험의 때에 인내로, 유혹의 순간에 말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순간에 긍휼함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신앙의 신력입니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은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의 면모가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논문과 같습니다.

반면 야고보 사도는 학문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을 실제적으로 행동해 보고 경험을 간략하게 쓴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을 실천하면서 깨달은 것을 평이한 글로 쓴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에 강한 분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중요하게 강조한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3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14, 17, 26절은 야고보서의 주제절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에 대해 저 사람은 영혼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몸은 있는데 죽은 것이 다를 바가 없다는 표현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은 남의 고통과 기쁨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공감능력을 잃은 사람을 영혼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함을 강조하다가 보니까 오해도 받았던 말씀이도 합니다.

특히 루터는 이 말씀을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외면 받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의 신앙 콘텐츠가 널리 전파되었을 때입니다.

이로 인해 행함이 소홀히 되었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 기독교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오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현실에서 드러나게 되는지를 아브라함과 라합의 시례를 통해 배우고 각자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행함이 있는 믿음은 선한 행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15~16)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돕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헐 벗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미래가 없는 사람을 돕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쓰는 이유입니다.

우리교회도 구제를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받은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구제는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콩 반쪽이라도 나눠먹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편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냉소적인 표현입니다.

당신과 나는 여기까지입니다.

당신의 허기를 위해 기도하겠소.

야고보 사도는 이런 필요를 채우지 않는 종교적인 행위가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그냥 보내는 것으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 사도는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은 가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8~19절에서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부정합니다.

형편을 알고 행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을 말하는데 그에 따른 삶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머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내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알고-신뢰가 깊어지고-결단-순종으로 나아가지 않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그 결과로 선악을 알게 되었지만 서로 핑계를 대고, 분열되고, 판단만을 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지식에만 갇힌 믿음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두 명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공통점은 목숨을 걸만한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야보고 사도도 아브라함을 실례를 들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함께 한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야보고 사도는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라는 것입니다.

21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를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삭은 삶의 기쁨이었습니다.

이삭은 불가능한 가운데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아들을 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납득할 수 없는 요구였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어 놓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살려 낼 것이라는 믿음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이삭을 내어 드려도 자손을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의 지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믿음이 조상으로 완성되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해석과 것과 동일합니다.

 

기생 라합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라합의 이름 앞에는 기생이라는 단어 붙어 다닙니다.

기생은 수치스럽고 천대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온 정탐꾼을 숨겨 줍니다.

밀고하면 상도 받올 텐데, 영웅처럼 대접받을 수 있었을 텐데 숨겨 줍니다.

여리고 입장에서 볼 때 배신자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같이 소문을 들었는데, 그 믿음의 지식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함으로 라합의 믿음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라합의 행위는 자기의 목숨을 거는 결단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의지와 결단이 따르는 일에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전부를 거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런 라합의 행위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만했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행위는 신을 선택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여리고 신이 아닌 여호와의 신을 섬기겠다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믿음의 지식을 바탕으로 믿음의 행동을 했단느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22)

전인적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감정과 의지적인 행동까지 가미 될 때 온전한 믿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행일치입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와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따른 열매는 맺는 것이 정상인데 안 맺는다면 가짜일수 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이냐? 진리로 시작된 믿음이라면 삶의 열매와 변화가 당연하게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산다는 것에 행동이 없겠느냐, 변화가 없겠느냐?

감정이 뜨거워지는데 그게 전부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내 감정과 머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느냐고 물고 있습니다.

 

적용) 내가 아브라함과 라합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두 분처럼 믿음의 행동을 보일 수 있었을까?

제가 어쩌면 아브라함은 아니어도 라합보다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 것입니다.

그런데 들통 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라합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저를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반면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겁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배려와 긍휼과 섬김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야보고 사도는 일차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믿음을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서로 돕고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차적으로는 깨닫는 순간 미루지 않고 즉시 순종함으로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하고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반면 가짜 믿음은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 빠졌습니다.

이 사실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을 보여 봐라.

행동으로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으로 옮겨보시길 도전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믿는 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행위를 통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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