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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민수기)-완성

하나의 공동체

by ysong 2021. 11. 3.

민수기 32:6~15절 여호수아 22:10~12

민수기를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까?

민수기는 모세 오경 중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에 비해 많이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니까 신앙생활에 큰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의 후반부는 광야 2세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1세대와 다른 2세대들의 믿음을 살펴봤습니다.

또 모세의 영성을 이어받은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된 것을 살펴봤습니다.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머문다는 것은 성령충만으로,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세워지고, 리더십도 세워졌습니다.

이젠 새로운 리더십 아래에서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하면 됩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싸워 차지하게 된 요단강 동쪽 길르앗 땅이 변수가 되었습니다. 그 땅은 목축에 적합했습니다.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갖고 있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그 땅을 자기들에게 주고, 자기들이 거기서 살게 해 달라고 청했기 때문입니다.

32장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족한 마지막 한 가지는 믿음의 공동체의식이었습니다.

 

32장은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속한 가정, 교회가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적인 교훈으로 배우고자 합니다.

 

분열의의 시작

작은 성공이 분열을 알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길르앗 땅을 차지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가축 떼가 많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머물게 해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볼 때 요단강 건널 필요가 없다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가족들을 돌보며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곳에 정착을 하고 하나님 섬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믿음의 공동체의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요구를 들은 모세가 격노합니다.

너희들의 행동은 공동체의 사기를 꺾고, 공동체를 낙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7, 9)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요구를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영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요구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자극시켰습니다.

12명의 정탐꾼 사건이 연상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보지 않고 육체적인 삶을 도모했던 1세대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15절에서 너희들의 요구는 이스라엘공동체를 멸망시키는 행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게 하는 요구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르우벤지파와 갓지파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들에게 가나안 땅은 생존과 육체적인 안락을 위한 터전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길르앗 땅에 현혹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들에게 역사의식과 소명을 말하면서 설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따라야 함을 상기시켰습니다.(12)

 

가나안 땅이 왜 약속의 땅인가요?

젖과 꿀이 흐리기 때문일까요?

그것만 생각했다면 목초지가 많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게 하면 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요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모판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을 통해 세계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땅입니다.

 

사명을 놓치면 믿음의 공동체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만 예수님 잘 믿고 복 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목적과 이유를 나에게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경제, 신분, 사회적 위치의 차이로 파당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각자 싸가지고 와서 교회 안에서 애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분이 높고 여우가 있는 분들은 먼저 와서 음식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노예들은 제시간에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시장하게 되고 포도주를 많이 마신 이들은 취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하면서 주님을 머리로 한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했던 것은 바로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의식이었던 것입니다. 두 지파는 미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말에 따르겠다고 순종합니다.

 

그러면서 두 지파는 모세에게 가족을 위해 집과 우리를 짓도록 시간을 달라고 요구합니다.(16~19)

이들의 요구를 들어준 모세는 여호와 앞에서 행동하라고 합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모세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실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명령을 여호와 앞에서 행할 것을 언약합니다.

25~27절을 요단강을 건너 함께 싸우겠다고 합니다.

싸움을 마친 후에는 이곳에 돌아와서 살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에 모세가 29절에서 그렇게 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공동체 연합을 깨지 않기 위해 므낫세 반 지파에게 그 땅을 줍니다.

12지파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전쟁을 합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순간에 분열의 위기를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었습니까?

공동체의 역사인식과 사명이었습니다.

모세는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분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얼마나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죄를 짓게 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앞으로 해야 할 사명을 일깨웠습니다.

두 지파는 분열의 위기 속에서 화해와 통합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를 이뤄가게 됩니다.

 

분열의 위기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났습니다.

6~7년 정도 걸린 긴 전쟁이었습니다.

이젠 약속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다시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가려고 합니다.

여호수아 22장은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요단강가에 제단을 쌓습니다.

보통 강이 국경이 되는 자신들이 죽은 후에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후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제단을 쌓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가에 큰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9.5지파는 이들의 행동은 하나님께 범죄를 저지른 사건으로 봤습니다.

9.5지파는 군대를 모아서 2.5지파와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오해로 인해 다시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22장은 오해로 시작된 갈등이 풀어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2장은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기 위해 필요한 대화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갈등에서 해결하는 대화법입니다.

 

적용) 민수기와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탐심으로 분열의 위기에서 모세는 사명과 역사의식으로 내세워 대화를 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오해를 풀어가는 대화를 합니다.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지기 위해서는 대화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과 견해를 갖고 있는 교회에서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를 이뤄가기 위해서는 대화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등은 의견의 차이로 시작됩니다.

칡넝쿨 갈. 등나무 등자입니다.

칡넝쿨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간다고 합니다.

두 가지가 얽히면 끊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화를 잘해야 합니다.

저도 대화를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해를 푸는 인칭대화법입니다.

2인칭 보다는 1인칭을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보다는 나는~~하는 대화법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짐작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칭사용법입니다.

9.5지파는 2인칭인 너희가~~~(16, 17, 18, 19)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진노케 해서 다 망하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이 있는데 또 다른 제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해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2.5지파는 같이 2인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우리들을 마음을 오해하고 있구나로 따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24, 25, 26, 27, 28, 29)라는 인칭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은 중심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1인칭을 사용하면서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상대방이 자기를 몰라서 비난하는 것에 말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갖고 좋게 한 것이라며 화를 내지 않습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화할 때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인칭을 격려하고 칭찬할 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판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너는 맨 날 게임만 하냐아이가 생각할 때 맨 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엄마는 네게 게임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하 단다.” 엄마의 감정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가 우리 엄마가 속이 상하고 슬퍼하는 구나, 내가 덜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그 모양이냐, 넌 맨달 그러냐로 시작되는 2인칭을 많이 쓰는 민족입니다.

추측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추론을 잘하는 민족입니다.

상대방에 쉽게 잘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저도 대화를 잘 못합니다.

인칭대화법을 쓸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돌아보길 바랍니다.

2인칭과 1인칭 중에 어떤 인칭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대화하는 편인가요?

나의 내 생각과 내 감정을 이야기 하면 됩니다.

가정에서도 1인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네가 그렇게 하면 엄마는 감정이 상하고 힘들단다,,,갈등을 해결해 주는 사람,,,2인칭은 자제되어야 합니다.

2.5지파는 ,침착하게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했습니다.

33절에 좋은 대화는 모두를 즐겁게 합니다.

오해가 풀어지고 축제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상황이 축제로 바뀌었습니다.

대화를 잘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신앙을 경험한 역사인식과 사명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의견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대화법입니다.

두 가지가 잘 배워서 즐거움이 가득한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 관계를 이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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