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5절
8장까지 배운 것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구원에 관한 이론을 다 배웠습니다.
로마서의 구조는 1~8장은 이론편이고 12~15장은 실천편입니다.
9~11장은 부록과 같습니다. 8장에서 12장으로 이어져도 무방합니다. 바울이 실천편으로 들어가기 앞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거부한 동족, 골육친척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을 하고 예수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참된 안식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 한 구석에 늘 아쉬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선교사님이 캄보디아, 중국에 선교를 해서 많은 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모국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아 있을 겁니다. 모국의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답답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미국에서 2천명이 넘는 대형교회를 맡아서 편안한 목회를 포기하고 모국교회를 살리겠다는 사명에 따라 돌아오신 분도 계십니다. 이렇게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1~3절의 말씀입니다.
1. 바울의 근심과 고통과 우리들의 근심과 고통의 차이
바울과 우리들은 삶의 무게가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에 대한 근심과 고통입니다. 우리들의 근심과 고통은 풀지 않는 문제, 자녀들의 문제, 직장의 문제들이 대부분 차지합니다.
이 문제들은 평생 함께하는 내용들입니다. 늘 따라다니는 문제거리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이 조금 이상적인 문제로 근심과 고통을, 하고,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근심과 고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동주시인은 신앙입니다. 서시를 중간을 보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근심과 고통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2. 바울의 심정을 갖자
3절은 바울의 근심과 고통의 내용입니다. 저는 바울이 3절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을 평생 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동족이요(1차 선교여행에서 루스드라), 태장을 때린 사람도 종족이었습니다. 재판을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40여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바울이 이를 갈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였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신앙생활을 어렵게 했다고 하면서 “남편이 성경책을 찢었다, 뺌을 맞기도 했다, 교회에서 늦게 끝나면 술 먹고 교회 앞에서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면서 지금은 그 남편이 자신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간증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도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자녀들을 위해 바울의 심정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가치를 아는 분만이 바울와 같은 심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신 그 권사님도 바울과 같은 심정이 있었나봅니다. 바울은 자신을 박해하는 동족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부터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울의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더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되면 교회들마다 전도를 강조합니다. 전도폭발, 해피데이, 전도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 전도를 위한 특별간증집회 등등 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늘 아쉬움이 있습니다. 3절과 같은 마음이 없이 중직자이기 때문에(장로, 권사, 집사),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도행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너도 바울과 같은 심정이 있니?”라고 물으신다면 많이 생각할 것 같습니다. 화,목요일 전도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지는데, 진리를 자유케 하는데라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처럼 골육과 친척을 위해 내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까지는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바울처럼 고백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전도, 직장동료를 전도에 앞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3절과 같이 바울의 심정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입니다. 고동종교는 사화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높은 도덕적인 수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하등종교는 자신만 복을 받으면 됩니다. 하등종교는 자신의 문제, 생사회복의 문제만을 위해 관심을 갖습니다. 점집에 가서 이 사회의 정의는 언제 실현되느냐고 물어 보십시요. 놀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바울과 같은 동족사랑이 필요합니다. 북한의 실상에, 탈북을 하여 중국에서 떠돌고 있는 꽃제비에 대한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북한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곳입니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고, 선천에는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일을 하지 않아서 가게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고, 소래는 한국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믿는자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탈북하여 한국에 입국한 이들을 대상으로 교화하는 정부기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일을 하시는 분을 통해 들은 말인데요, 그들에게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정보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복음을 접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북한을 위해 할 수 있는 미약합니다. 그러나 북한 민족을 향한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처럼, 친족을 위해, 동족을 향한 심정을 회복되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1:8절 성령이 임한 결과는 전도자가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가정이고 사마리아가 직장이고, 땅 끝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2. 믿는 가정의 자녀들이 믿음을 갖도록 하자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았습니다. 4,5절의 말씀입니다. 양자 됨(아들이 아니었는데 아들로 삼았습니다), 영광(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고),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훌륭한 선조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라(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오셨음)는 8가지 복을 받았습니다.
어느 민족보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영적인 환경을 줬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는데 예수님을 안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안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복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우리 주변을 잘 보면 이스라엘민족과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믿는 가정의 자녀들인데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을 기회를 제공 받았지만 거절하는 가족들을 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둔 분들은 바울과 같은 고통이 있을 겁니다.
한계례신문 토요판 인터뷰에서 “가족 부녀의 종교 분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봤습니다. 아버지는 목회자이고 딸은 독립을 해서 혼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매주 아빠는 딸이 교회를 갔다왔느냐고 확인하고 딸은 몇 년째 갔다왔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다 딸이 솔직하게 아빠에게 말하면서 통화하게 된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이라고 말하는 일요일. 여지없이 문자가 온다. "교회 다녀왔냐"고 묻는 아버지의 연락이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다녀왔다"고 답한다. 대답을 하자마자 '어느 교회, 어떤 말씀, 몇 부 예배' 식의 질문이 연달아 쏟아진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거짓말을 한 지 몇 년째인가. 매번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늘은 교회 안 갔어. 가서 무의미하게 앉아 있을 바엔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라고 답했다. 평생을 목회자의 삶으로 살아온 아버지와 그 시간만큼을 '목사 딸'로 살아온 나. 우리는 수화기를 마주하고 처음으로 종교에 대해 대화를 시작했다.”
딸-아빠, 이제 그런 문자 보내지 마요. 제가 교회를 다녀 왔다고 하면 그걸로 안심이 되나요? 몸만 예배당에 있으면 뭐해요? 설교 시간에 졸고 있을 바엔 차라리 집에서 잠을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의미 없이 오가는 것, 남들에게 보이는 형식, 이젠 거짓말 못하겠어요. 그리고 저, 교회 안 간 지 몇 년 되었어요.
아버지-교회는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지켜야 할 도리야. 네가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주일에는 예배당에 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아빠는 네가 단 한번도 형식적으로 교회를 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몇 년 동안 교회를 가지 않았다고? 사실이니? 거짓말이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저는 목사인 아버지도 이해가 되고, 딸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대화가 계속되면서 아빠인 목사님은 기도만을 강조합니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10:1~3절을 볼까요.
바울은 골육친척인 이스라엘백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해가 안되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매 맞는 것으로 생각,,그래 맞아도 싸다고 이해하면 되는데,,욥의 경우는 이해가 안되니까 고통스러워 합니다.
예) 바울이 고통하는 이유는 진정한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그들에게는 8가지의 복을 줬는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바울이 깨달은 이유를 9장 6절이후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은 6~9절까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을 근원으로 삼고 후손을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자녀가 된다”고 약속을 하나님이 어긴 것이 아니냐고, 약속이 폐기된 것이냐고 물음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바울의 대답은 구원은 혈연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종류의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니라 언약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는 이스마엘입니다. 적자는 아니지만 장남입니다. 첫 번째 아들입니다. 혈연의 아들입니다.
약속의 자녀-둘째 아들인데 이삭(9절)---창22:2(독자(한국에서 하나)--뜻이 있는데,,성경에서 독자(독특한 아들,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에 독특한 아들이다) 요3:16절은 독생자=독자=외아들을 보내주셨다. 한국은 외아들의 개념,,,성경개념은 독특한 의미의 아들입니다. 약속의 아들입니다.
약속은 언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의 ‘약’자가 언약이라는 것, 옛날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약속을 맺었기 때문에 구약,,예수님을 중보자로 약속을 맺었기 때문에 신약이라는 합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사실을 상세히 기록 창15:9~18..10절 중간을 쪼개서 양쪽으로 벌려 놓고,, 중간에 길을 만듬,,17절따는 햇불-임재의 상징,,고기 사이로 지남=언약체결 의식, 아브라함의 눈 높이에 맞춰 준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수준에 맞춰서 아브라함이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눈 높이는 맞춰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약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는 교회관입니다. 교회는 언약공동체입니다. 언약백성의 언약공동체입니다.
왜 믿음의 가정의 자녀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모든 육신적인 후손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도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권리가 아닙니다. 믿는 이유는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혹시 자녀들, 가족, 친척 중에 믿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세요.
'고아의 아버지'와 '5만번의 기도 응답'으로 잘 알려진 조지 뮬러목사는 5명의 친구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5년 후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10년 후에 두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25년 후에 넷째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친구를 위하여 52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다섯째 친구는 뮬러가 세상을 떠난 몇 달 후에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52년 동안 기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토록 기도했던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 약속의 자녀이고 육신의 자녀인지 모릅니다. 누가 선택되었고 누가 유기되었는지 모릅니다. 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잘못으로, 게으름으로, 최선을 하지 못함으로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언약공동체입니다. 호레이쉬부시넬이라는 기독교교육학자-그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도하는 것, 말씀 읽는 것, 예배드리는 것에 실패하지 않도록 잘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에 앞서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버울과 같은 뜨거운 심정입니다. 바울과 같은 근심과 고통입니다. 이런 은혜가 회복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못된 열심 (0) | 2021.11.15 |
---|---|
긍휼의 인생 (0) | 2021.10.20 |
구원을 확신하는 찬양시 (0) | 2021.08.14 |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0) | 2021.07.28 |
성령이 인도하는 방법 (0) | 2021.07.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