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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by ysong 2021. 7. 28.

로마서 8:26절

신앙의 3요소-지정의(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 회개의 3요소-지정의(깨닫고, 슬퍼하고, 결단하고) 이렇게 하도록 하시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갈등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늘 내 뜻대로 살아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진지하고, 심각하고, 지루한 것으로 들리는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데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거우면 그만입니다.

 

저도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인생을 살라고 당부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 15: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절대로 불쌍하지 않을 겁니다. 17, 18절은 우리의 상식과 충돌합니다. 17절과 18절은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표현들이 있습니다.

17절에서 우리들을 상속자라고 합니다. 부모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자녀라는 겁니다. 창세기 12~50장은 누가 아브라함의 후사인가? 상속자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사는 롯도 아니고, 엘리에셀도 아니고 이스마엘도 아니고 약속으로 낳은 이삭이었다. 이삭의 후사는 장자인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고, 야곱의 후사는 12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이스라엘이었고, 예수님이었고 교회이다.

 

우리는 대단한 뿌리와 전통을 갖고 있는 가문의 상속자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분입니다. 못하실 일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삼성기업의 상속자라고 하면 대단한 권력과 부를 누립니다. 졸부의 상속자도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하물며 우리는 우주만물의 통치하는 분의 상속자인데, 그 특권과 권력을 대단하겠지요.

그런데 17절을 보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상속자인 우리들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택한자를 구원하기 위해 수치와 고통, 모욕과 죽음의 고난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표현은 히브리서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또 빌2:5~8절에서도 예수님의 고난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6-비우심, 낮아지심, 겸손-권력과 특권을 내려놓고 비움

7절은 비움의 표현

8절은 복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복종의 최고의 절정입니다.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는 복종하기위한 기도입니다. 비움과 복종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위대한 상속자입니다. 그러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고난을 받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비움과 낮아지심, 겸손의 자리가 상속자의 자리이며 이렇게 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난은 당연히 따라옵니다.

 

여러분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세요.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해 고난을 피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오는지 찾아보세요. 놀랍게도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말씀만 점점이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난받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언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꾸로 고난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8절을 읽어볼까요. 현재 우리들의 상태는 고난입니다. 여기서 현재는 개인적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동안 받을 수 있는 고난이 현재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일생 동안 고난당할 각오를 하고 살지 않으면 안된는 것입니다.

 

아시아게임을 보면서 이슬람 여자들이 머리에 히잡을 씁니다. “카타르는 히잡을 벗고 출전하라는 주최측의 통보에 반발해 경기를 포기라는 기사는 보면서 그들은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지만 고난당할 각오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학교에서 밥을 먹기 전에 기도하고, 회사에서 바르고 정직하게 하려다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남들처럼 아파트투기를 하지 못해서 힘들게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고 양보하고 배려하려고 하다가 손해를 봅니다. 이런 저런 다양한 환경에서 처하게 되는 고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현재의 당한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비교입니다. 어떤 비교인가요?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는 겁니다.

 

올림픽과 같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금,,동메달을 따거나 그들이 이룬 목표를 달성했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받은 영광이 그동안 고난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영광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제가 가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외웠던 말씀입니다. 힘이 되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 변화되어 영원히 살아가는 삶을 소망하면서 고난을 넉넉히 이기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만 장차 나타날 영광을 소망하느냐? 아닙니다.

피조물도 영광을 소망합니다. 19~22절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자연만물입니다. 동식물, ,,별을 포함한 모든 만물입니다.

19-하나님의 아들들=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타나는 것을 고대합니다.

20-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게(목적에 벗어나 쓸모없게 된 것=마이크가 부서져서 쓸모없게 된 것), 21절에 부패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뜻이 아닙니다. 별도 죽고, 나뭇잎도 죽고, 세상의 모든 것은 부패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굴복시키게 하신 분이 계십니다.

 

창세가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했던 땅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변질되고 부패하고, 악화되었습니다.

 

같은 원리는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함으로 피조물이 저주를 받습니다.

호세아 4:1~3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땅이 슬퍼하고, 동식물이 쇠잔하고, 바다의 고기가 없어집니다.

 

계시록에도 인간이 타락함으로 마지막 심판이 임박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이 땅, 공중, 바다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변화되어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대로 회복되기를 고대합니다. 하나님이 좋았더라는 상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의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의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경작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못쓰게 되고 부패하게 된 피조물이 현재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구원은 전우주적이고 위대합니다. 자연만물의 구원과 함께 갑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만물을 봐야 합니다. 환경오염은 인간의 구체적인 죄성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향락, 소유욕, 낭비, 욕심을 채우려는 것으로 인해 병들고 있습니다. 자연보호도 우리들의 청지기직분을 회복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조물의 탄식의 소리에 귀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피조물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23~25절에 우리=신자들도 탄식합니다.

23-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우리 몸은 연약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합니다. 우리 몸은 제한적입니다. 오염으로 가즉합니다. 영혼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몸의 속량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화의 몸을 갖게 될 것을 고대하면서 25절에서처럼 참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피조물과 우리들만 탄식하느냐? 아닙니다. 26~27절은 성령님은 탄식한다는 겁니다.

26-성령님이의 탄식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한 탄식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기도할 줄 모릅니다.

 

정말로 아주 힘든 일을 만나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너무 지쳐있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너무 성공해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너무 바빠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연약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인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는 연약성 때문에 친히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신이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27-하나님이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십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들을 위해 탄식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탄식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모름에 대한 탄식이고,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탄식입니다.

 

탄식은 연약하기 때문에 따라오는 소리입니다. 고난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아 하라고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탄식은 소망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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