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4~18절
바울은 형제이며 골육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고통하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구약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창세기를 통해 깨달은 것이 바로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있고, 사랑하는 자녀와 미워하는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의 인생을 연구하면서 알게 됩니다. 인생이 이해가 안되면 성경으로 돌아가면 이해하게 됩니다.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녀입니다. 처음부터 약속한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미뤄지고 이뤄지지 않으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사라의 종을 통해 자식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 구약의 내용을 통해 바울은 아버지는 같지만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불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내용이 7~9절입니다.
예수님을 안믿는 것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야곱과 에서도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11절, 13절, 16절입니다.
이 사실만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려운 내용입니다.
질문1
성도 여러분! 선택받지 못한 에서의 입장이라면 억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에서는 심은대로 거두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남자답고, 사냥을 잘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시 털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심은대로 살아가는 인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창25:33~34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축복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복 받을 태도로 살지 못했습니다. 창 26:34~35절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결국 에서의 인생은 갈 6: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에서는 심은대로 거두는 인생을 끝까지 살았습니다.
야곱도 속이는 인생으로 시작을 합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삼촌을 속이는 자신의 이익 앞에서 사기기질이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에서와 차이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긍휼을 배풀어준 사건이 얍복강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사건입니다. 야곱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이려고 에서형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바로 긍휼의 때입니다.
얍복강만 건너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친 것은 속여서 취한 권리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온전한 축복자로 만들기 위해, 야곱을 성결케 하기 위해,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속이는 인생을 살아갔을 겁니다. 야곱은 그동안 겪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알았던 겁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을 잘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절부터 읽으면서 설명, 11절=선택, 13절에 사랑은 개입했다는 것이고, 미워했다는 것은 니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내버려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두 종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다면서 심은대로 사는 인생이 있고,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인과율이 아닌 은혜의 법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인간의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14절에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선택을 했는데, 그런 선택이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은 공평하다. 절대로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15~18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바로의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연출한 연극에서 악역을 맡았을 뿐인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7:3~4절에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또 로마서 9:17절을 보면 바로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져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악한 생각을 품고 행하도록 집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이런식으로 보면 하나님은 악의 창조자가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악을 알지도 못하고 상관도 없는 분인데,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티었습니다. 그는 10가지 재앙이 임해 나라가 쑥대밭이 될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고 비티다가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완악이라는 것은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바로가 고집을 부리도록 내버려 둔 결과가 바로 10가지 재앙이었다는 겁니다. 바로만큼 하나님을 믿기 좋은 환경은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찾아가서 말을 합니다. 바로가 듣지 않습니다. 모세가 재앙을 예고합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바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 사실은 이미 우리가 배운 로마서 1:24이후에 나옵니다. 내버려두니까 우상을 섬기는 인간은 성적으로 타락을 하고,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죄의 원리에 따라 살면 악을 만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무거운 것은 땅으로 떨어진다. 심은대로 거둔다라는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자존심=고집--내버려두심으로 가면 바로처럼 됨
자존심=고집인데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개입하시고 이를 깨닫고 회개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원리를 거스리는 것이 긍휼의 법칙입니다.
고집이 세면 모두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셔서 사명을 줍니다. 완악해진 이스라엘백성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기 4:1,,이적을 행하도록 함, 지팡이, 손, 나일 강물,,,이적을 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은혜입니다. 완악하지 말고 마음이 부드러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선택과 유기를 하셨는데 어찌해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주권에 따라서 선택과 유기를 했다면 왜 심판을 하시고 대적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20~24절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하지만 이 대답은 우리가 기대했던 식의 답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책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를 질문자를 꾸짖고 막아버리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나님의 주권에 의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무조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토기장이가 귀히 쓰는 물건과 천히 쓰는 물건을 정하면 그만이다.” 마치 하나님을 토기장이와 같은 무법자의 이미지로 보면 안됩니다. 토기장이가 용도를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대우하시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보면 안됩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창조자는 피조물에 대한 용도와 목적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이크의 용도와 목적은 만든 사람이 정합니다. 마이크가 난 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같은 위치에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0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절은 이사야 45:9절을 인용한 것인데, 토기장이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따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타락한 역사는 하나님과 똑같은 위치에서 판단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8:6절, 8절, 10절
1) 토기장이의 비유의 목적은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이 빚었기 때문에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피카소가 그렸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무생물은 있으라는 곳에 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생물에게는 결정권을 주고 인격적인 대우를 하셔서 은사를 개발하여 역할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는 목소리를 키우는 역할을 하는 목적과 용도를 드러내야 하듯이 사람도 창조의 목적과 용도를 드러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자유로운 존재-고가품입니다.
2) 토기장이의 비유의 목적은 운명론으로 생각을 하여 바꾸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22절에 말씀처럼 하나님은 토기장이 다르게 오해 참으셔서 돌아오기를 기다라는 사랑의 주님이라는 겁니다. 롬 2:4~5
예수님은 교만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32~33절입니다.
결론
구원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모둔 인간은 고집센 사람으로 멸망의 길로 갑니다. 바로가 고집이 세서 망했습니다. 에서가 고집이 세서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지금도 고집센 사람들이 바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내버려두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각 질문해 보세요. “하나님 저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아셨다는 것입니까? 왜 저 같은 형편없는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질문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내가 좋아서 그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답 앞에 감격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줄 아는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 좋아하심은 세상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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